푸에르토프린세사 무사 도착 파티
칠흑 같은 어둠.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공항 정전. 그렇게 암흑 속에 팔라완 섬을 만났다. 필리핀 남서쪽 끝에 솟아오른 긴 섬. 남북으론 우리나라만큼 길지만, 동서로는 한 시간 반 정도만에 끝과 끝을 갈 수 있다. 섬의 주도 푸에르토프린세사는 팔라완의 중허리 지역으로 시티는 동쪽 끝에 위치한다. 스페인 어로 Puerto Princesa. for princess. 공주를 위한. 1864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 2세가 딸 에우랄리아 공주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며 이름을 붙였단다.
지도 상으로 우리 숙소는 멀지 않아 보인다. 공항 위쪽 도로만 쭉 따라가면 되고 주변으론 집들도 많다. 좀 깜깜하지만 아직 7시밖에 안 됐잖아, 씩씩하게 출발한다. 큰 도로를 지나 가로등이 하나둘 사라질 무렵 흠칫. 그래도 마닐라보다 훨씬 안전하다 느낀다. 이따금 지나는 트라이시클(세 바퀴 달린 운송용 오토바이) 불빛에 의지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다. 너무 덥고 목이 마르던 차에 때마침 나타난 간이 슈퍼. 길가의 슈퍼들은 대개 매표소처럼 생겼다. 안에서 물건을 보여주면, 창구로 돈을 주고 물건을 받는 방식이다. 목이 마르니까... 맥주 주세요!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를 보고 놀란다.
“1리터짜리 병이잖아! 오마이갓, 1리터짜리 병맥주라니! 윤혜, 이걸로 우리 팔라완 무사 도착 파티를 하자! 혹시 숙소 근처에 슈퍼가 없을지도 모르니 무거워도 지금 사자!”
지금 맥주를 사야 할 이유가 너무 타당해서 웃기다. 90페소(약 2,000원)를 주고 산다. 파랗고 얇은 비닐봉지에 담긴 갈색 병. 맥주병이 너무 시원하다며 마치 담요에 싸인 아기처럼 소중히 내게 건넨다. 너도 많이 더울 텐데... 내가 맥주를 들었으니 가방은 자기가 들겠다 한다. 무릎 아프지 않냐며. 자기는 괜찮단다. 더워도 힘들어도 그저 즐겁고 설레는 마음. 예쁜 존중. 우리는 슈퍼든 채소 가게든 불빛이 보이면 달려가 구경한다. 마치 보이스카우트가 꼬마 인디애나 존스를 꿈꾸며 캠프를 떠나는 양, 앞뒤로 가방을 메고 의기양양 걷는다.
문제는 걸어도 걸어도 숙소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작전 타임. 가장 밝은 곳을 찾아 멈춘다. 무사 도착 파티를 당겨서 하기로 한다. 병따개가 없어 보조 배터리로 병뚜껑을 딴다. 퐁! 뚜껑이 포물선을 그리며 나무 뒤로 날아간다. 맥주는 이미 미지근해졌지만 그래도 천국이다. 앉지도 않고 한 병으로 주거니 받거니, 덜컹이는 비포장길 소음과 흙내음을 안주 삼는다. 서로 상대방이 더 많이 마시는 게 아닐까 경계하는 모습에 몇 번이고 웃음이 터진다.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마지막 남은 물 한 병을 나눠 먹는 것 같다. 가장 맛있게 맥주를 마시는 법일 거다.
한 시간 반이 걸려 우리는 숲 속 나무 숙소에 도착했다. 손을 잡고 동네로 나선다. 어두운 가로등 아래, 흙길에 어른어른 비치는 우리의 모습이 아름답다. 슈퍼 앞에선 퇴근한 아저씨들이 후줄근한 런닝 차림으로 맥주를 마신다. 어릴 적 아빠와 옆집 아저씨 모습처럼 정겹다. 우리도 이젠 ‘시원한’ 맥주로 진짜 무사 도착 파티를 한다. 아저씨들 덕에 맥주의 진짜 가격은 85페소란 걸 알았지만, 5페소로 우린 더한 행복을 얻었으니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