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여권을 빨아 버렸다

여행 5일 만에 일어난 대참사

by 전윤혜


날이 밝고서야 숙소를 둘러본다. 덜덜 도는 구식 에어컨에 습한 공기, 도마뱀들. 아기자기한 나무 침대와 빛바랜 무지개색 얇은 침구. 자주색 바께스와 샤워기가 있는 작은 화장실. 밖으론 1층, 2층, 독채, 조식 장소, 공용 공간이 나무들 사이로 얽혀 있다. 이제야 진짜 여행을 시작한 느낌이다.


많이 걷는 우리는 티셔츠를 하루에 두세 개씩 갈아입는다. 어제도 저녁 내 걸었지. 바지며 속옷이며 땀 닦은 수건이며 바닥에 쌓인 빨랫감이 한 더미다. 니콜라스는 태평히 조식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나는 오로지 빨래 생각뿐인데 (그렇다. 그는 먹는 것이 인생 최고의 기쁨이고, 나는 무언가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선 음식 맛이 없다.) 양이 많으니 물에 불려라도 놔야겠단 생각으로 옷들을 모아 바께쓰에 담고 비누를 푼다. 그리고 종종종종 니콜라스를 따라나선다.


식빵 두 쪽과 계란 프라이, 생선 튀김, 과일 조금, 버터, 꿀. 덜그럭 덜그럭 나무 풍경 소리를 들으며 설탕 잔뜩 탄 커피까지 여유롭게 마신다. 이 섬은 진짜 미지의 섬이야, 오늘은 스쿠터를 빌려서 이 동네를 한 바퀴 돌자, 진짜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등의 기대에 부푼 이야기들을 하며.


© Nicolas Riou


방에 돌아와 니콜라스는 지도를 보고 스쿠터로 어딜 갈지 생각하고, 나는 빨래를 시작한다. 조물조물 옷가지를 주무르는데 무언가 딱딱한 게 잡힌다. 그의 바지 주머니, 네모난 것, 이게 뭐지. 검붉은 바탕에 금색 글씨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République française.


아, 프랑스 여권이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프랑스 여권이다. 우리 여행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왜 얘는 여권을 주머니에 넣어 놓은 거야! 설마, 괜찮을 거야. 오만 생각이 스친다. 모기만 한 소리로 “니콜라스….” 부르고선 문밖으로 여권을 내민다.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니콜라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온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여권을 펼친다. 사진에 반쯤 벗어진 머리와 눈썹, 그리고 눈코입의 실루엣만이 남은 어떤 범죄자가 있다.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 헤어 드라이기도 없는 이곳, 나는 마른 수건을 꺼내 한 장 한 장 물기를 찍어 내기 시작한다. 니콜라스가 프랑스 대사관에 전화를 걸려는데 아뿔싸, 필리핀 유심은 데이터 전용이다. 로밍으로 걸어 한참을 대기한 다음 돌아온 답변은 다른 업무 중이니 30분 후에 다시 전화해 달란 것. 사소한 것들이 점점 그의 짜증 지수를 올린다. 약해진 여권이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한다. 니콜라스가 밖으로 나가 버린다.


© Yoonhye Jeon


끔찍한 시간이 지나 겨우 대사관과 연결된다. 대사관에서 알려 준 세 가지 선택지. 첫째, 여권을 잘 말려서 출국을 시도해 본다. 통과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둘째, 마닐라에 있는 대사관에서 여권을 재발급받는다. 신청한 날로부터 최소 3주 후에 수령할 수 있다. 셋째, 여권 대체 증명서를 발급해 줄 수 있으나 프랑스로 가는 비행 편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바람을 쐬고 온 니콜라스는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윤혜, 나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어. 내가 호주에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건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서였어. 지금까지도, 다음 일정을 위해서도 돈은 쓸 만큼 썼지. 그런데 나 여권으론 절대 출국 못할 거라 확신하거든. 새 여권 때문에 다 포기하고 마닐라에 3주를 더 머물러야 한다면, 그것 때문에 또 돈을 써야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다른 곳도 아니고 마닐라라니. 사실 너도 알잖아.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니콜라스의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된다. 사실 우린 일주일 후 발리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과 숙소, 발리에서 푸껫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고, 수수료 없는 여행용 국제 카드와 그의 새 프랑스 유심을 발리의 숙소로 보내 놓은 터였다. 반송을 호텔에 믿고 맡길 수도 없는 노릇. 이미 돈은 지불했으니 나보고 발리에 가서 우편을 받고, 너라도 즐기라 한다. 그럴 순 없다.


“니콜라스. 같이 여행한다는 건 무슨 일이 생겨도 '같이' 헤쳐나가는 거라 생각해. 그게 아무리 치명적이라 해도.... 게다가 넌 지금까지 경비의 많은 부분을 부담했어. 내 주머니 사정을 아니까. 그러면서까지 나와 같이 여행하고 싶었던 거잖아. 그걸 다 아는 내가 널 여행 시작한 지 며칠 만에 너희 나라로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어. 그것도 오로지 나 때문에.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네가 마닐라에 있어야 한다면, 나도 같이 있을 거야. 내가 발리에 가야 한다면, 갔다가 네 우편만 가지고 바로 돌아올 거야. 네가 마닐라에 체류하는 돈, 내가 발리에 갔다가 돌아오는 돈, 날린 항공권 다 내가 부담하고 싶어. 나는 그 돈을 낼 필요가 있고, 우리의 여행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게 만들고 싶어.”


“네 돈? 그 돈은 나중에 네가 프랑스에 정착할 때 쓸 돈이야. 그걸 지금 써 버리면, 나중에 프랑스에서 네가 힘들어졌을 때 어쩌려고 그래.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어. 그냥 내가 떠나 버리면 모든 게 정리될 거야. 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지금 결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없어. 더 늦기 전에 오늘 하기로 했던 일이나 하자.”


Puerto Princesa. © Yoonhye Jeon


공항 앞에 봐 둔 스쿠터 대여점으로 간다. 마이 브라더, 마이 프렌 외치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니콜라스가 흥정을 한다. 여권 보여달란 말에 여자친구가 여권을 빨아서 지금 없다며 너스레를 떤다. 대단한 사람. 대신 프랑스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핑크색 스쿠터를 빌린다. 현금으로 계산해야 해서 환전해 놓은 페소를 다 써 버렸다. 오늘은 일요일. ATM으로 엄청난 수수료를 물고 환전소를 찾아 번화가로 간다. 통장 잔고를 보며 내 한순간 실수로 날려 버릴 그의 돈이 얼마인지 가늠하고 만다.


그 와중에 니콜라스는 배가 고프다. 그는 배고플 때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로컬 식당은 주로 반찬을 쭉 두고 한 스쿱에 얼마, 밥 한 스쿱에 얼마씩 덜어 파는 캔틴(급식) 형태인데, 일요일이라 가는 곳마다 문이 닫혀 있다. 좋은 일들만 있어도 모자랄 판에. 좀체 기분이 나아질 수가 없다. 성당 근처엔 뭐가 있겠지, 배회해 보지만 예배를 드리는 신도들뿐이다. 필리핀 느낌이 물씬 나는 로컬 성당. 니콜라스가 오늘은 사진 안 찍냐고 머쓱하게 묻는다.


“그럴 기분이 아니야….


© Yoonhye Jeon


해변을 달려 한적한 길 묘지 마을 끝까지 살펴봐도 허사. 결국 어느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돈을 이렇게 쓰고 싶지 않은데…. 정적 속에 밥을 먹고 공항 아랫마을을 더 둘러본다. 여행자 펍들이 몇 개 있다. 중국 단체 관광객이나 이따금 백인 할아버지들과 필리핀 아가씨들이 시간을 보내는 곳. 오랫동안 고민하다 가장 싼 300ml짜리 머그 두 잔을 시킨다. 오늘 아무 일도 없었다면 좋은 분위기에서 스스럼없이 맥주를 시켰겠지? 팝송이 흐르고 단체 관광객들이 떠들썩하다. 분명 시끄러운데 오도카니 혼자 떨어진 기분. 생각을 떨쳐내려 애쓸수록 마음은 더욱 힘들어진다.


날이 어두워지고 숙소로 돌아온다. 하루 종일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무얼 할지도 모르겠다. 습한 방에 펼쳐둔 여권은 여전히 눅눅하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


정적이 흐른다.


“있잖아. 윤혜. 나 오늘 하루 참 괴로웠어. 모든 걸 잃은 것만 같았지. 돈도 시간도 너조차도…. 그런데 진짜 이상한 게 뭔 줄 알아? 그 괴로움 속에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단 거야. 분명 나도 화는 나는데, 네가 종일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니 그게 더 마음 아프더라. 우리 자책하지 말자. 오늘 일은 같이 실수한 거야. 나는 여권을 넣은 채로 바지를 바닥에 두었고, 너는 주머니를 확인하지 않은 채 그걸 물에 담갔을 뿐이야. 내가 먼저 조심했다면 애초에 없었을 일이야.”


“니코….”


“내가 네게 화를 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거, 나를 위하다가 생긴 일이잖아. 그 귀찮을 일을 선뜻 날 위해 해 주려던 그 마음이 고마워서….”


와락. 예상치 못한 니콜라스의 대답에 눈물이 나고 만다.


“윤혜, 네 말이 맞아. 우린 함께 여행하기로 했어. 마닐라에 머물러야 하든, 발리로 갈 수 있든 나 너와 함께 남을래. 함께라면 즐겁지 않은 일도 즐거워질 거야. 지금처럼!”


싱긋 웃더니 나를 꼭 안아준다. 돌아보니 그는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내 탓을 하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나 같으면 사실을 안 순간부터 “아니 그걸 확인도 안 하고 물에 넣으면 어떡해!” 빽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 바빴을 텐데.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확인 안 한 네 잘못이라고 상처를 줬을 텐데. 여권을 빤 것도 미안하지만, 나였으면 못할 일들- 잘못한 일들도 괜찮다 고맙다 다독여 주는 모습에 더 미안해진다. 펑펑 울어 버린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우리 앞으론 여권 생각하지 않기로 해. 이미 팔라완에 들어온 이상,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진 나갈 수 없어.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즐기지 못한다면 그게 더 슬플 거야. 나, 공항에서 부딪혀 볼래. 뜻이 있다면 나는 발리에 갈 수 있을 거야. 안 되면? 마닐라에 남는 거지 뭐. 앞으로 여권 얘기는 금지!”


니콜라스의 강력한 의지로 ‘여권’은 금지 단어가 된다. 그래. 우리가 서로 마음 안 다치고 현명하게 이 시간을 헤쳐 나가자. 어느샌가 이 이야기가 커다란 추억으로 변해 있을 거야. 여권을 빨아 버리다니. 바보 같이. 훗날 이 이야기를 웃으며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너 덕분이야. 오로지 따뜻하고 넓은 너 덕분이야.


“사랑해. 그냥, 너와 헤어지는 걸 상상할 수 없었어. 그뿐이야.”



우리의 아름다운 밤. © Yoonhye J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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