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타야의 땅

태국 중부 아유타야, 펫차분

by 전윤혜


고적한 땅.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유적 마을. 18세기 버마(미얀마) 왕국의 침략으로 무너진 아유타야 왕국의 흔적. 물이 말라 가는 연못 옆, 조용하게 선 신전Wat Phra Ram 앞에 모터바이크를 세운다. 미로 같은 벽돌 길에 서서, 무너져 가는 거대한 석탑과 머리와 팔다리를 잃은 불상들에 잠시 말을 잃는다.


펫차분 가는 길에 부러 아유타야를 들렀다. 짜오 프라야와 파 삭, 롭 부리 세 강이 만나며 감싸 안은 이 땅에 수백 년의 역사가 잠들어 있다. 앙코르 왓을 세우고 이름을 떨치던 크메르 왕국(캄보디아 지역)의 작은 변방 왕국이었던 아유타야. 크메르 인을 몰아낸 우통Uthong 왕이 1350년 이곳을 수도로 삼고 400년을 번성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에서 내려온 중국과 서쪽에서 넘어온 인도인, 페르시안들이 말레이 반도에서 올라온 대항해 시대의 서양인들, 바다 건너온 일본인들이 만나 교역하던 길목, 짜오 프라야 강 중류의 비옥한 땅은 성할 수밖에. 가장 잘 나가던 17세기의 나라이Narai 왕의 봉건 치세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와 비견되기도 한다. 실제 루이 14세는 아유타야에 외교관을 파견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그렇기에 외세의 침략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야심을 견제하면서, 툭하면 싸움을 걸어오는 버마(미얀마)에 대항하다 결국 점령당하며 왕국은 멸망한다. 버마는 몇 달 뒤 원나라 공략에 전력하기 위해 철수하지만, 신흥 세력인 장군 탁신은 방콕으로 수도를 옮기고 톤부리 왕국을 세운다. 아유타야 시대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 끝이 전쟁의 끝과 머지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유적들은 지금까지도 폐허로 남아 있다.


Wat Chai Watthanaram. ⓒ Yoonhye Jeon


방콕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이곳에 닿았다. 역사 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은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중앙의 연못을 기준으로 왼쪽으로는 신전과 유적들이, 그 아래쪽엔 시장과 카페가, 오른쪽에는 골목골목 사람이 모여 산다. 수평으로 이어진 대로와 수직으로 낸 운하, 네모지게 조성한 연못들은 물론이고 직선도로가 엮여 수많은 사거리가 생겨난 걸 보니, 아유타야는 처음부터 계획된 도시다. 당시 수코타이 왕국을 멸망시킨 우통 왕이 새로운 시작을 위해 강과 도시를 두루 살피고 심혈을 기울여 세웠을 거다. 왜, 발해의 문왕文王이 상경으로 수도로 옮길 때 장안을 본떠 철저하게 도시를 계획했듯, 자신이 다스릴 도시에 효율적이고 완벽한 통치 시스템을 갖추고 싶은 게 왕의 욕심일 테니까. 아유타야는 강 바깥 남쪽 땅에 각 나라 상인들의 거주 지역까지 정해놓았을 만큼 구획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그래서 보통의 오래된 시가처럼 골목골목 살피기보다 탁 트인 뜰과 잘 닦인 도로를 거니는 맛이 있다.


왓 프라 람에서 나와 조금 더 걸어 본다. 네모반듯한 돌로 다져지고 지어진 오래된 유적엔 안타깝게도 그늘이 많지 않다. 사람들이 왜 이곳에서 더위를 먹는다는지 알 것 같다. 다행히 구름 낀 날씨 덕에 찌를 듯 올라선 탑 꼭대기는 맘 놓고 바라볼 수 있다. 풀이 자라고 새가 둥지를 튼 크메르식 탑은 육중하면서도 위태하다. 평균 30도가 넘는 날씨와 덥고 습한 우기를 버티며 지금까지 살아남았지만 그게 언제까지일지 우리는 모른다. 붉은 벽돌과 아스팔트가 교차하는 길에 코끼리 행렬이 지난다. 코끼리를 타고 넓은 유적 일대를 돌아보는 코스는 아유타야 패키지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야 모터바이크가 있어 쉽게 움직이지만 이 땡볕에서 걸을 자신이 없으면 기사를 대동하거나 코끼리를 타야 한다. 끝없이 유적을 돌고 돌 코끼리들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걷다 보며 느낀다. 더위와 고즈넉함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아유타야는 사시사철이 더운 동네다. 이다음에 태국에 올 때, 코끼리들이 더 이상 사람을 태우지 않고, 우리가 시간이 많아서 아주아주 천천히 걸을 수 있을 때 다시 들르자 한다.


ⓒ Yoonhye Jeon

아유타야에서 펫차분까지는 4시간이 걸린다. 펫차분은 국립공원을 세 개나 끼고 있는 길쭉한 주로, 하트 모양 태국의 중심에 있다. 태국의 1번 도로를 타고 달린다. 세상에 정말 광활하다. 지금껏 경험한 쾌적한 태국 도로의 최고봉. 넓은 차선에 때문에 표지판과 신호등이 너무 조그맣게 보일 정도여서 휑한 느낌마저 드는데, 마치 에드워드 호퍼나 데이비드 호크니의 정적이고 평면적인 그림 속에 있는 것 같다. 정적을 깬 건 소음도 쌩 달리는 자동차도 아니고 백미러였다. 동네를 나설 무렵 조금씩 움직이던 백미러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아예 접혀 버린 거다. 백미러 기둥이 속도를 이기지 못해 자꾸만 돌아간다. 한 손으로 백미러를 붙들 수도 없는 노릇. 옆으로 바퀴 여덟 개짜리 화물차들이 덜커덕덜커덕 소음을 내며 지나간다. 뒤에 누가 어디서 오는지 볼 수가 없다.


“조심해! 왼쪽!”


“빨리 서자! 망가지면 어떡해!”


난리 법석을 치는 나 때문에 더 사고가 날 모양이다. 이러다가 백미러가 날아가서 뒤차에 박히고, 뒤차는 브레이크를 밟고, 추돌 사고가 나고... 온갖 불안이 잠식한다. 고속도로니까 설 데도 없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잘 보이던 정비소들이 꼭 이럴 때만 안 보인다. 나는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뿐인데 니콜라스는 태연하다.


“왜 그런지 알아. 제일 먼저 보이는 샵으로 들어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비소처럼 보이는 허름한 집에 섰다. 영어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보여주니 건너편에 가 보란다. 돌아 돌아 유턴을 해 왔더니 샵이 없다. 다시 돌아 돌아 겨우 엔진 오일 집을 발견하고 스패너를 빌린다. 너트를 빼 상태를 확인한다. 나는 니콜라스가 혼자 고치다가 모터바이크를 망가뜨릴까도 걱정이다.


“걱정 마. 조임새가 헐거워진 거야. 다시 조이면 튼튼해질 거야. 물론 멀쩡한 바이크보다는 위험하지만, 호들갑 떨 정도로 심각하지 않으니까 걱정 마. 내가 손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니콜라스는 맞지 않는 스패너로 겨우겨우 조여가며 나를 안심시킨다. 서로의 영역은 믿어 주는 건데, 내가 너무 대놓고 걱정만 한 것 같아 외려 미안해진다. 방콕에서 뻗어 올라온 1번 도로는 아유타야 오른쪽 사라부리Saraburi에서 갈라진다. 1번 도로는 북서쪽의 치앙 라이로, 2번 도로는 북동쪽의 라오스 비엔티안Vientien으로 간다. 우리는 1번도 2번도 아닌 ‘21번 도로’를 타고 올라간다. 마크가 양옆에 산을 끼고 달릴 수 있다고 알려준 그 도로다. 그 도로가 펫차분을 가로지른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배가 고프거나 멋진 곳이 나오면 서기로 한다. 이것 봐, 엔진 오일 집에도 섰잖아.


ⓒ Yoonhye Jeon


배가 고파 선 길가 식당에선 영어가 한 마디도 안 통한다. 아유타야를 떠난 뒤로는 정말이지 현지에 들어선 기분이다. 계란, 오케이? 새우, 오케이? 해서 볶음밥을 주문하니 아저씨가 요리를 척척 한다. 맥주 한 잔을 시켜 얼음에 희석해 마신다. 맥주가 금세 미지근해지는 동남아 나름의 칠링chilling 방식이다. 방콕을 떠난 지 한나절이 채 되지 않았는데 둘 다 벌써 얼굴이 익어 있다. 아유타야에서 꽤 더위를 탔나 보다.


“니코. 태국 도로는 그동안 달리던 도로랑 뭐가 다른 거 같아? 단, 팔라완 섬 고속도로 말고.”


“먼지! 먼지가 많아. 비포장에서 오는 차가 많아서 그런지, 화물 트럭이 많아서 그런지. 그런데도 도로 컨디션이 굉장히 좋네. 넓기도 하고. 국도도 깨끗하고 넓어. 아니, 차가 다섯밖에 없는데 도로가 이렇게 넓을 일이야? 하하!”


국도를 타서 좋은 점은 차가 적다는 거다.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큰 트럭과 차들이 가득했는데 아유타야를 지나고 국도로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만의 발라드(balade. 프랑스어로 산책, 드라이브)가 가능해진다.


“윤혜. 오늘은 엉덩이 어때?”


나도 나름 두 번째 모터바이크 경험이랍시고 어지간히 편해진 모양이다. 한 시간 타고 제발 내려달라 했던 지난번에 비해서 훨씬 견딜만하다. 실제로 좀 더 크고 편한 기종이기도 하고. 물론 멋없는 상가 주택이 드문드문 들어선 풍경은 필리핀보다 삭막하고 황량하지만... 그것도 나름의 매력이다. 다행이다, 하고 니콜라스가 말을 이어간다.


“분명 목적지를 정해서 가고 있지만,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기분이 들어. 정보가 없어도, 갈 곳을 몰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 그만큼 기대도 없어. 그저 언젠가 멋진 풍경을 만나겠지, 내가 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겠지 하는 느낌에 설레. 자유를 느껴. 기분 좋은 자유야.”


부처님 구경. ⓒ Yoonhye Jeon

먼지 날리는 도로를 달린다. 니콜라스가 멀리 거대한 하얀 불상Wat Tham Phrathat Khao Prang을 본다. 산속 커다란 불상이라. 우리에게는 설악산 신흥사의 대불, 팔공산의 갓바위처럼 익숙한 모습이지만 그에겐 이토록 이국적인 풍경이 없다. 길 끝 절 앞까지 가서 그 크기를 확인한 다음에야 궁금증이 풀린다. 커피집 앞에 붙은 지도는 짐작컨대 ‘펫차분 10경’쯤 되는 듯하다. 아니, 이렇게 볼 게 많은 곳이란 말이야? 하긴 산에 둘러싸인 곳인데 볼 것이 천지겠지! 태국어로만 쓰여 있단 게 단점이지만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뜻이니 더 좋다.


오늘은 꼬불꼬불한 골목 대신 21번 국도를 쭈욱 달려보기로 한다. 펫차분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유타야 유적처럼 조용하고 잔잔하다. 펫차분 역시 아유타야의 땅, 나라이 왕이 세운 도시다. 남은 도시와 바뀐 도시를 본다. 특별할 것 없이 하천과 논과 집들이 지난다. 별 과시도 없고 번잡하지도 않아 좋다. 펫차분의 어원인 ‘풍족한 농작물’처럼 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먹은 비옥한 토지는 이곳 사람들을 여유롭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내일부터는 그 펫차분 사람들이 즐기던 10경이란 데를 좀 둘러봐야겠다.


펫차분 가는 길. 태국 중부-동부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다. ⓒ Yoonhye J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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