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날아갈 것만 같아

태국 치앙라이-치앙마이, 그리고 까사 레스토랑

by 전윤혜


1,300m에서 결국 우비를 꺼내 입는다. 춥다.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지금은 치앙마이에서 치앙마이로 가는 길. 두 도시 사이를 가로막는 쿤째Kun Chae 산맥을 넘어야 한다. 치앙라이에서 서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렸을 쯤 산길 입구에 다다른다. 이미 500m 고원에서 시작한 길은 내려가는 기온을 느끼지 못할 만큼 천천히 고도를 오르는 듯싶었다. 그러나 30분이 채 안 되어, 커브들이 등고선을 가뿐히 뛰어넘기 시작한다. 경사가 가팔라질수록 몸이 차가워진다. 1,000m 고도를 지나며 구름을 통과한다. 1,100m, 1,200m, 1,300m... 차가운 바람이 뺨의 온도를 떨어뜨린다. 구름 위를 올라왔는데 또 구름이 있다. 여기는 어디일까.


IMG_5702.jpeg
ⓒ Yoonhye Jeon

“니코, 나 너무 추워. 바람이 너무 시려. 어디 좀 내려줘.”


양철 지붕 덮인 정자에 모터바이크를 세우고 우비를 꺼내 입는다. 뒤따라 오던 트럭 아저씨도 이곳에 차를 세우더니 커피를 한 잔 타 마신다. 셀프 휴게소 같은 모양이다. 아저씨는 맑은 날이면 여기서 보는 경치가 참 좋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1,300m 고지.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의 경계다.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우비 소매를 장갑 안에 잘 정리해 넣고 단추도 꼭 잠근 뒤, 다시 출발한다. 나는 단추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오는 게 싫어 우비를 거꾸로 입는다.


여행한 뒤 처음으로 내 음악을 듣고 싶어졌다. 니콜라스에게 한국 음악을 소개해 줄게, 하고선 최은진의 2집 <풍각쟁이 은진>을 튼다. 일제 강점기 시절 유행한 만요. 재미난 가사에 웃지만 한편으론 그 속에 슬픔이 에인, 그 저릿한 느낌이 오늘따라 생각난다. 추운 날 안갯속,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산 꼭대기, 구름에 둘러싸여 골짜기 돌아 넘어가는 그 기분 그 목소리에 이대로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IMG_5693.jpeg ⓒ Yoonhye Jeon
내뿜는 담배 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조용한 다방에서 뮤직을 들으며 흘러간 옛 님을 부르누나
<다방의 푸른 꿈> 중


꿈같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다 보니 멀리 빛이 쏟아진다. 빛을 따라 고개를 내려가니 마을이 보인다. 그 빛을 보았는지 마법처럼 마지막 곡이 흘러나온다.


맑은 하늘에 새가 울면
사랑의 노래 부르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세요
<이태리 정원> 중


치앙마이 근교의 분지 도시 프라오Phrao에 다다른다. 구름이 어찌나 낮게 끼었는지. 낮은 산허리가 흰 치마를 둘렀다. 최은진의 3집 <헌법재판소>로 넘어간다. 논과 논, 저렴한 재료로 급하게 지은 이층 집들, 풀숲과 전봇대를 지난다. 귀에는 전위적인 근대가요.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실린 <청춘 블루스>와 사이키델릭 록 <무너진 사랑탑>, 톡톡 튀는 내레이션의 <흑자청춘>까지, 시대를 풍미한 노래들이 우리 시대를 입고 흐른다. “이 음악은 말이야. 1940년대 말에 나온 건데 말이지. 그 때면 우리나라가 식민 통치에서 갓 벗어난 거야. 광복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 있는데... “ 신이 나 니콜라스에게 조잘조잘 이 음악들에 대해 설명해 준다.


ⓒ Yoonhye Jeon

프라오의 남쪽 끝까지 내려와 조그만 산을 넘는다. 치앙마이 북쪽을 감싸는 산, 여기만 넘으면 그곳이 지척이다. 조그만 천을 따라 내려간다. 천 건너 오른편엔 잘 단장된 골프 야드가, 왼편으론 논이 이어진다. 논 사이로 드문드문 아무렇게나 자란 야자수와 골프장의 관리된 숲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플레이리스트는 빌리 라파울Billy Raffoul로,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로, 라디오헤드Radiohead로 넘어간다. 도시가 가까워 오며 플레이리스트의 목소리도 도시의 우울을 담은 이들로 바뀐다. 해가 지려 한다. 차가 많아지고, 도로가 넓어진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6차선 도로다. 와, 30층이 넘는 아파트까지 있다. 모든 것이 크고 높다. 퇴근 행렬에 치어 치앙마이에 입성한다. 드디어 왔구나.


IMG_5714.jpeg
IMG_5715.jpeg
치앙마이의 퇴근길. ⓒ Yoonhye Jeon

지하 차도와 핑 강을 건너 구시가로 간다. 치앙마이 구시가는 네모 반듯 해자에 둘러싸여 있다. 계속되던 버마(미얀마)의 침략에서 치앙마이를 지키던 흔적이다. 우리는 길을 헷갈리는 바람에 해자를 뱅글뱅글 돈다. 그 사이 해가 붉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하나둘 차들이 전조등을 켠다. 숙소는 서쪽 문에 가깝다. 구시가 숙소들은 새로 단장한 백팩커스들이 대세였다. 오랜만에 백팩커스 기분을 내 볼까? 했지만 말끔한 곳은 도미토리 침대 하나에도 가격이 꽤 나갔다. 우리는 대신 골목길 안쪽의 허름한 방을 구했다. 조식 포함 350밧(약 13,500원).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1층의 어두컴컴한 방을 내어준다. 복도 쪽으로 커다란 창문이 두 개나 나 있다. 문 앞에서 고양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여니 따라들어와서는 온갖 애교를 부린다. 어쩐담, 우리는 맛있는 게 없는데... 줄 게 없으니 실컷 놀아라도 주자! 짐을 바닥에 던져 놓고 입구에 쪼그려 앉아 고양이와 장난을 친다. 가르릉, 금색 고양이는 자기가 주인처럼 방을 휘젓는다.


IMG_5716.jpeg ⓒ Yoonhye Jeon

니콜라스의 향수병을 달래러 피자집에 가기로 한다. 이쯤 되면 동남아시아 여행이 아니라 이탈리아 여행이나 다름없다. 검색을 하다가 조금 놀란다. 가로세로 1.6km의 이 작은 구시가에 이탈리아 레스토랑만 몇 개인 건지. 그렇게 고른 까사Casa 레스토랑은 동쪽 끝 자그만 코너에 자리해 있었다. 이탈리아-태국 국제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다. 화려한 테이블도 장식도 없이, 밀짚 장식과 꽃화분들, 고양이 조각들이 장식된 작은 식당. ‘No WIFI, Only Good WINE’ 와이파이도, 충전용 콘센트도 없는 이곳.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맛있는 음식, 좋은 사람 앞에 두고 휴대폰 하면 슬프잖아요?”


당연한 말씀. 벌써 마음에 든다. 주인인 알베르토는 호쾌하다. 누가 이탈리아 아저씨 아니랄까 봐 벽에 AS ROMA 깃발을 천장까지 붙여 놨다. 유럽 남자 둘이 만났는데 축구 이야기가 빠지면 섭하지. 오래된 라이벌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축구 현황을 주고받는다. 축구는 잘 모르니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알고 있다. 결론은 서로 자기 나라 축구가 최고라고 생각할 것! 하하. 니콜라스는 몹시 굶주린 표정으로, 이탈리아 음식 먹은 지 너무 오래됐다며 입맛을 다시고 예의 손바닥을 비빈다. 메뉴판을 펼치기 위한 의식이랄까. 메뉴판 첫 장부터 이탈리안 레스토랑 십계명Decalogue이 나온다. 좋은 이탈리아 음식을 즐기기 위해 해야 할 것/하지 말아야 할 것.


IMG_8174.JPG
IMG_9783.JPG
ⓒ Yoonhye Jeon
-절대 음식에 케첩이나 타바스코 소스를 뿌리지 말 것(절대!)
-절대 엑스트라나 재료 변경을 요청하지 말 것
-절대 음식을 빨리 나오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 말 것
-매운 음식은 매워야 하는 법
-절대 식사 중에 커피를 마시지 말 것
-절대 뜨거운 음식이 앞에 있는데 휴대폰 하느라 시간을 버리지 말 것
-스파게티와 리조또는 사이드 디쉬가 아님. 메인 메뉴처럼 음미하길
-당신이 경험한 이탈리아 스타일 음식을 모두 진짜 이탈리안 음식이라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요리사가 좋은 이탈리안 셰프가 될 수는 없음


길고 긴 십계명은 결국 ‘일단 먹어라 그리하면 알게 될 것이니’였다. 좋은 이탈리아 음식을 맛보려면 음식에만 집중해 다오. 커피, 휴대폰, 소스, 개인 취향 등 방해되는 것들은 금지. 매번 이야기하기 입 아프니까 마치 홈페이지의 F&A 항목처럼, 자주 묻는 질문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지 미리 답을 달아놓은 것이다. 이탈리안 정통을 내는 척하는 다른 레스토랑에 대한 일갈도 있다. 그동안 이탈리안 음식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우리가 이탈리안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까르보나라에 크림을 넣는다거나, 두꺼운 도우에 여러 종류의 토핑을 믹스한 피자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방식은 설렁탕에 꿀떡을 넣어 먹는 거나 다름없다. 각 재료와 그 조화를 존중하지 않은 처사. 커피도 마찬가지다. 빅 머그에 마시는 아메리카노를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요청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에스프레소에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일단 진짜처럼 먹어보고 나서 얘기하자는 거다. 만약 무언가가 다르다면, 그동안 가짜 이탈리아 음식을 먹어 왔단 뜻이 되는 거고. 대단한 자부심이다.


이 집은 빵도 만들고, 면도 만들고, 다 직접 만든다. 손님의 요청을 대놓고 금하는 것도 대단하다. 재료가 바뀌는 순간, 용량이 줄고 느는 순간 맛이 변하는 것 맞다. 그러니 요리사의 선택을 믿어달라는 뜻이다. 여기는 서브웨이가 아니니까(물론 비건/베지테리언/알레르기는 제외). 표현이 강해 보여도 실은 간절한 부탁이다.


IMG_3201.jpeg
IMG_3386.JPG
ⓒ Yoonhye Jeon

전채Antipasto로 카프레제 샐러드Insalata Caprese를 시킨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우리에게 주인아저씨 알프레도는 빵을 내어온다. 소금기 도는 찰진 빵. 그리고 카프레제의 신선한 모짜렐라와 토마토, 바질, 좋은 올리브유. 메뉴로 나는 라자냐Lasagna, 치즈에 고팠던 니콜라스는 콰트로 포르마지Quattro formaggi 피자를 시킨다. 니콜라스는 먹는 내내 말을 잇지 못한다. 때론 이상한 신음소리도 낸다. 디저트로 티라미수와 판나코타까지 털어먹고 식후주Digestivo를 찾는다. 알프레도는 마침 자기가 담근 리몬첼로Limoncello가 있다며, 한 번 맛보겠냐며 권한다. 아아, 이럴 수가. 정말 달콤하고 상큼한 맛, 그러면서도 강하고 뻑뻑한 진짜 리몬첼로. 물 타고 얼음 띄운 싼 맛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애지중지 담가놓은 매실주 같은 진국. 이 습하고 더운 여름밤의 치앙마이에서 따사로운 이탈리아 남부가 느껴진다. 아, 태국에서 이탈리아라니. 음식만이 만들 수 있는 힘이다.


계산서를 보니 빵과 리몬첼로를 서비스로 주셨다. 사실 이 레스토랑은 치앙라이의 다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비해 평점이 좋진 않다. 와이파이가 안 돼서, 휴대폰 충전을 맡기려면 돈을 내야 해서, 피자를 잘라주지 않는다고 해서, 즉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나 나는 여행객들의 어떤 행동이 아저씨와 맞지 않았을지 짐작이 간다. 식당의 본질을 생각해 본다. 먹으러, 즉 음식을 즐기러 오는 게 아닌가! 우리가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알프레도의 음식을 즐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니, 니콜라스 리액션에 감동한 걸 수도 있다. (아, 아니면 이탈리아가 역시 최고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지도... 농담.) 어디서나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까.


니콜라스와 만난 이후로, 그러니까 7개월이 될 동안 두 번째로 밝은 웃음을 본다. (첫 번째는 시드니의 프랑스 가정식 레스토랑. 그 날 200불 넘게 썼다.) 내가 고개에서 날아갈 것만 같았던 것처럼, 니콜라스는 지금 날아갈 것만 같다. 치앙마이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이뿐이 아니겠지만, 우리는 벌써 행복해서 하늘을 날고 있다.




후일담. 글을 다 쓰고 니콜라스에게 내용을 대강 설명해 줬다. '니콜라스는 지금 날아갈 것만 같다.' 하고 글을 끝맺었다 하니, "나는 너랑 여행 시작했을 때 이미 하늘로 날아간 걸. 저때는 이미 하늘에 있었을 때야." 대답한다. "방콕에서 싸웠을 때도?" 물음엔 "그땐 하늘에 바람이 심하게 불었어." 감동받은 내게.. "그리고 나 지금도 하늘에 있어." 대답한다.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