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소울푸드가 되어준 프랑스 가정식 포토푸

 고급음식점에서 맛볼 수 없는 프랑스 가정식 요리  

어릴 적 이원복 선생님의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을 읽으면서 프랑스를 잘 몰랐던 내가 신기해 했던 것이 있었다. 고급수프는 별론으로 하고, 물 넣어서 오래 끓여먹는 수프류는 가난하게 여겨지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은 당시는 지금은 기억 속에도 아련한 1990년대였다. 그렇게 프랑스 식문화에 대한 한 시선을 간직한 채 어언 20년 가량이 흘러 나는 파리에 살게 되면서 아직도 이때 읽었던  <먼나라 이웃나라>의 만화 컷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수프’에 대한 시선을 이야기하자면 조금 복잡하다. 책에서 기억하는대로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만든 수프는 정말 고급 수프로 쳐지고 있었다. 샹제리제에 위치한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메뉴에서 고급 수프를 본 적도 있다. 또 간혹 손님을 대접할 때 잘 끓인 수프를 메인 식사로 내어가기도 한다. 언젠가 시아버지의 한 지인 분에게 우리 부부가 초대를 받았을 때, 저녁 식사의 메인 메뉴로 잘 끓인 야채 수프와 곁들이 음식을 대접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도 나는 은연중에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을 떠올리며, 수프를 대접받은 게 참 신기했었다. 파리의 힙한 브런치 식당들에서도 건강한 야채 수프를 판다. 이전처럼 수프가 가난한 음식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 현대인에게 보다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을 제공하는 측면에서 더 보편화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지내보니 내가 기억했던 한 편견은 이미 현대 프랑스에서는 급격히 허물어져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주의를 좋아하는 요즘 세대에게 수프는 고급음식이든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간편식이든 잘 팔린다. 바람 추워지는 요즘, 몇년 전 이맘 때 내가 처음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겪은 프랑스 수프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다.


 

오랜기간 끓여 만드는 프랑스식 소고기곰탕
포토푸(pot-au-feu)


여름에 파리에 도착한 내게 찬바람 솔솔 부는 10월의 가을이 찾아왔다. 따뜻한 한국의 국물 음식을 그리워하던 나에게, 남편은 조금만 더 날이 추워지면 겨울에 프랑스 가정에서 끓여먹는 음식을 하나 요리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의 레시피는 프랑스에서 2차 세계대전을 겪고 살아오셨던, 지금은 돌아가신 시할머니의 것이었다. 부모님보다 더 할머니, 할아버지와 유대감이 깊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남편인지라, 그도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요리하는 음식들이 많았다. 아마 내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그가 내게 해주었던 프랑스 음식들 대다수는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요리한 것이리라.


드디어 남편이 공언했던 그 ‘따뜻한 국물 음식’을 끓여주는 날이 되었다. 남편의 요리 재료 준비는 마치 숭고한 그 무엇과 같았다. 그는 우선 소고기 각기 다른 부위 3종류를 사왔다. 그 다음에는 유기농 마트에 들러 배추, 당근, 무, 파, 감자, 샐러리 등을 사왔다. 마지막으로 월계수와 마른 허브 잎사귀를 공수해 온 그는, 마침내 요리 준비가 끝났다며 홀가분한 표정으로 부엌에 들어갔다. 프랑스의 음식은 보통 바로 만들어 신선할 때 바로 먹는 경우가 많은데 프랑스에서도 오랜 기간 자작히 끓여내는 수프류가 있다는 사실 역시 신기했다. 아마 포토푸는 음식 조리법에 있어서는 프랑스 음식의 돌연변이일 것이다. 이래저래 처음 접해보는 프랑스 가정식 수프를 직접 만든다는 역사적인 현장에 서있는 것 마냥 한껏 들떠 나는 부엌 옆에 서서 그에게 재잘대며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남편, 내가 어릴 적에 한국에서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책을 읽었었어. 거기서, 아직도 기억나는 만화 컷이 있는데 프랑스인들에게 수프는 가난한 집에서 먹는 음식이라고 여겨지는 시선이 있댔어. 그건 아마 물을 넣어서 계속 양을 늘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그런데 이 포토푸도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야? 소고기가 비싼데 가난한 집에서 해먹는 음식일 수가 있는건가? 아니면 수프 중에서도 포토푸는 고급음식인가? 뭔가 좀 모순적으로 느껴지네”라고 말하며 나는 손을 오므려 그의 얼굴 앞으로 마이크를 건네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야채를 손질하던 남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수프류가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 여겨진다는 게 옛날로 치면 맞는 말이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시대에는 소고기가 지금보다는 비싸지 않았대. 옛날에 상대적으로 부담없이 해먹었던 게 수프류인거지. 심지어 내 할아버지의 할머니인 증조 할머니는 재료가 아까워서 한번 포토푸를 끓이면 계속 야채와 물을 넣어가며 비슷한 맛을 유지하면서 몇 주나 두고 우려먹었다고 하셨어. 누구나 집에서 부담없이 해먹을 수 있는 요리였으니 프랑스 사람들의 ‘가정식’이 된 거겠지. 그런데 지금 시대의 시선으로 보면 반은 틀린 말이 되었다고 생각해. 우선 지금은 예전보다는 소고기 가격이 비싸졌지. 게다가 패스트푸드보다는 천천히 오래 조리하는 슬로우푸드의 가격이 더 비싸지. 그럼 옛날에 상대적으로 손쉽게 해먹던 수프류인 ‘포토푸’가, 오늘날에는 비싼 소고기 가격과 슬로우푸드 이미지 때문에 갑자기 엄청 고급음식이 되는 걸까?”


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부자는 아니었어. 프랑스를 직접 휩쓸고 지나간 2차 세계대전을 겪었거든. 넉넉하진 않은 살림에 이 수프를 계속 끓여가며 가족들의 두끼, 세끼 이상을 책임져야 했거든. 전쟁을 겪은 세대들에겐 프랑스의 역사가 숨어있기도 한 음식이라고 생각해. 그래서인지 나한테 이 포토푸는 소울푸드같이 느껴져.”


그 순간 나는 할말을 잠시 잃었다. 은연중이라 하기도 뭐할 정도로 내가 당당하게 가졌던 ‘프랑스 음식이 전부 고급스러울 것이라는 편견’은, 각종 미디어에서 잘 다듬어진 프랑스 식문화와 미슐랭(michelin)으로 대변되는 프랑스의 깐깐하고도 엄격한 식문화에 대한 이미지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프랑스의 수프란, 샹제리제나 고급 식당에서 내오는 ‘잘 만든 수프’라든가 현대적으로 변용된 힙한 ‘건강식 수프’ 정도를 떠올리는 정도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만 하루를 자작히 끓인 포토푸


포토푸는 불 위에 올려진 냄비(pot-au-feu)라는 뜻이다. 겨울이면 프랑스의 집집마다 할머님들이 집에서 가장 큰 솥을 꺼내 이 포토푸를 자작히 끓여내었을 것이다. 남편이 포토푸를 끓여주는 것을 보니, 문득 냄비에 소고기를 넣어 오래 올려두고 끓여먹는 한국의 소꼬리곰탕이 생각났다. 내게도 어릴 적 한국에서도 소고기곰탕 끓이는 냄새를 밤새도록 맡으면서 잠이 들곤 했더라는, 지금은 추억의 한 편이 된 이야기가 있다. 그때는 우리 역시 넉넉하지 않게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러고보면 소꼬리곰탕은 내게도 추억의 음식이었다.


남편이 포토푸를 끓이고 자작하게 끓여낸지 만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 우리는 마침내 그 맛을 볼 수가 있었다. 세 가지 부위를 끓여 눅눅하게 퍼지는 소고기의 맛에 특히 감자와 무의 맛이 버무려져 있었다. 첫 술을 뜨자 무에서 퍼진 섬유질이 느릿느릿 국을 떠다니며 소고기와 만나 깊은 맛을 더해주는 흡사 한국의 소고기뭇국의 맛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술을 뜨자, 오랜기간 끓인 한국의 소꼬리곰탕의 깊고 뜨거운 맛이 위장에 차곡차곡 가득히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남편의 프랑스 가정식 요리를 먹으며, 신기하게 내 어릴적 한국에서의 추억이 떠오르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이런 음식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좋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연료’로서의 음식이 아닌,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프랑스 음식과 나의 연결고리’가 생긴 기분이었다.


보통 야채와 고기를 국과 함께 떠서 그릇에 내간다. 하지만 처음 끓인 경우 내용물이 많아 이렇게 따로 담아 먹을 수도 있다.


잘 차려입고 격식을 갖추어 먹는 ‘고급스러움’이 프랑스 음식에 대한 느낌이라는 선입견이 있던 내게 그는 ‘외식으로 사먹을 수 없는 프랑스 가정식은 이런 맛이구나’ 하는 것을 하나씩 알게 해 주었다. 프랑스 가정식 수프인 포토푸로 포문을 열었고 이후로 프랑스 음식에 대한 어떠한 편견을 깨부수고, 프랑스의 진짜 식문화를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우리 결혼식을 위해 부모님이 프랑스를 방문하셨을 때의 일이다. 어둑어둑해지는 어느 저녁, 시댁 근처인 노르망디 도빌의 어느 격식없는 테라스에 앉아서 ‘화이트와인으로 요리한 홍합찜과 감자튀김’을 드시며 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리고 평생 프랑스 음식의 이미지는 호텔의 높은 층에 위치한 프렌치 레스토랑이나 고급스럽게 빼입고 점잖게 앉아서 식사하는 프렌치 에티켓을 이미지로 가지고 계셨는데, 이렇게 비격식적인 분위기에서 ‘힘빼고’ 먹으며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 역시 프랑스 음식이라는 것에 많이 놀라셨다고 했다.


나도 남편의 포토푸 요리를 시작으로 한차례 그런 편견을 깨부순 경험이 있기에 아버지의 그런 ‘고백’은 한층 즐겁게 다가왔다. 하긴 생각해보면 한국 뿐 아니라 프랑스 음식에 대한 고급 이미지는 세계 어디나 비슷할 것이다. 아무래도 미슐랭(michelin)이라는 식당 별점 제도가 생긴 것이 프랑스인 만큼 프랑스 특유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과 깐깐한 예술적 감각이 더욱 유명하게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프랑스 음식 하면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예술적 이미지를 우선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 음식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니 오래 전 봤던 애니메이션 <라따뚜이(Ratatouille)>의 비평가 ‘이고’의 일화가 생각이 났다. 음식에 남다른 감각이 있는 쥐인 ‘레미’가 사람인 ‘링귀니’와 함께 요리를 하는 설정으로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픽사의 애니메이션이다. 여기서 음식 비평가인 ‘이고’는 까다로운 미식가 입맛으로 유명 레스토랑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사람이다. 남의 음식을 깐깐하게 평가하고 점수 매기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이고는 구스토의 식당이 링귀니가 만든 음식으로 명성을 되찾자 구스토의 식당에 선전포고를 하고 방문한다.


그런 그에게 서빙된 최종병기 음식은 바로 가지와 토마토와 호박으로 요리한 프랑스 가정식 라따뚜이였다. 반신반의하며 라따뚜이 한 숟갈을 문 순간, 이고는 어릴 적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라따뚜이의 맛을 떠올린다. 비평가로서 점점 까다로운 입맛을 들이대며 다른 사람의 음식을 쉽게 평가했던 이고는 모든 격식과 잣대를 집어던지고 그릇을 맛있게 싹싹 비워먹게 된다. 애니메이션 속 비평가 이고가 오랜만에 배부르게 맛있게 먹었던 최고의 음식은, 프랑스의 분자 요리도, 고급 레스토랑에서 출시한 혁신적 디자인의 음식도 아닌, 바로 그가 어린 시절 순수하게 받아들였고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던, 어머니의 요리였던 것이다.


@ Pixar <Ratatouille>


나도 남편이 해준 프랑스식 소고기곰탕인 포토푸를 먹을 때면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시간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먹먹해진다. 아마 남편도 포토푸를 먹으며, 어릴 적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매해 보냈던 행복한 여름 방학 시간을 추억할 것이다. 어릴 적 할머니가 포토푸를 벽난로 위 가마에 얹어두시고 장작을 조금 넣어 불을 지피면 포토푸는 보글보글 그렇게 천천히 끓었을 것이다. 온 집안에는 그 향기가 가득히 퍼지고, 그의 가족들은 행복한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부족하면 넉넉히 물을 붓고 재료를 조금씩 더 넣어 그렇게 계속 위로를 주었던 음식일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버전의 <먼나라 이웃나라> 책에서 읽었던 대로 수프는 옛날 프랑스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해먹던 음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이 음식이 고급이냐 아니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한 사람이 그 음식과 가졌던 경험과 추억에 따라 다른 것이다. 내가 프랑스에 살면서 타파한 또 한가지 프랑스의 클리셰는, 바로 프랑스 음식은 모두 고급스러울 것이라는 편견이었다. 그리고 포토푸는 내게 프랑스에서 만난 첫번째 소울푸드가 되어 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에 집을 구하면서 알게 된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