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목을 일부러 모호하게 했다.
뭘 아는데 뭐가 안된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데 실천이 안 된다는 말인지,
나는 원리와 방법을 다 아는데, 현실이 뜻대로 안 되는 이유인지...
사실 상관없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의 삶은 원래 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리듬정렬이란 주제로 삶의 의미를 정리하면서,
우리는 결국 내가 알든 모르든 '알아야 할 배움'들을 신경계 차원의 각인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전 글에서도 우리가 안다라는 말을 connaître로 표현하며,
진짜 경험으로 알아야만 안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의 무의식은 신경계 차원의 각인이 끝나야 다음 페이즈의 과제를 열어 보이는 듯하다.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누구나 경험이 있다.
어른들이 이래저래 하지 말라고 해도,
‘안다고’ 말을 듣지 않는다.
직접 입에 넣어보고 못 먹는 거 알고,
고집부리면 손해 보는 것 알고,
그러면서 좀 깨닫고 '알게 되면' 이제 그 수준의 배움은 넘어선다.
그런데 어릴 때도, 못 먹는 거, 손해 보는 거 알면서 끝까지 고집부리는 캐릭터들도 있다.
그 캐릭터들은 지금 어른들이 하는 말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다.
'남들이 옳다는 일에 대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내 고집을 부려봄'을 신경계에 끝까지 각인하는 경험이 필요할 뿐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배움의 신경계 각인은
의외로 의식이나 논리가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합리해 보이고, 엉성해 보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실패와 손해가 뻔히 보이는 과정도 때로는 그 생의 과정에서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나는 에고의 집착을 살아내어 태운다고 표현하는데,
다르게 표현하면 에고의 욕망에 근거한 목표가 실제로 좌절될 때,
그 에너지를 끝까지 통과시키는 것이다.
이건 단순하게 에고의 욕망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실패를 신경계에 각인시키며 통과함으로써만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좁은 스코프로 단기간에는 실패처럼 보이는 일이
장기적으로 살펴보면 원래 에고가 원하던 길로 다시 데려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냥 때로는 어느 순간의 실패와 좌절까지도 신경계 각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정도를 얘기하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무의식이 의도한 실패는 결과적으로 내 중심 구조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나를 살리는 실패다.
그런데 나의 에고가 욕망하는 것을 좇는 과정에서,
나를 소모시키고 고갈시키고,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라면,
이건 내가 잘못된 구조 속에서 에고의 집착을 좇고 있는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