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정렬 관점에서 본 '나는 반딧불'의 구조적 모순

by 헤스티아

리듬정렬™은 나의 중심에 연결되어 살아가기 위한 무의식, 의식, 신경계 조화를 위한 일련의 태도를 말한다. 이건 오늘 글의 진짜 주제가 아니어서 간략하게 정리해 본 것이고, 사실 리듬정렬™이 무엇인지 인지과학 용어로 번역해 내는 것이 나의 작업 중 하나다. 상당한 시간과 작업량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라, 이 언어를 내가 의도한 대로 잘 번역해 낼 수 있는 게 현재 나의 목표 중 하나다. 그래서 일상적 용어로 리듬과 정렬을 쓰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리듬정렬™이란 단어를 구분해서 쓰고 있다.


리듬정렬™은 브런치에서 여러 번 글을 나눈 것처럼 나의 오랜 명상과 태극권, 미학 공부에서 바탕이 된 개념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나는 명상 등을 통해 개인이 내면의 중심만 잡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상당히 많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문장 뒤에 반전을 기대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 내 인생에서는 이 명제가 참으로 작동한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는 자꾸 그런 이야기를 떠들고 싶어 하다가, 계속 멈칫했다. 브런치를 비롯한 몇몇 플랫폼에서 난 계속 '앞으로 이런 내용들을 공유해 보겠다' 하다가, 자꾸 멈추고 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보면 나는 그냥 불성실해 보이는 창작자일 수 있는데, 글로만 맥락 없이 전달할 때 위험해질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추고, 어떤 맥락에서도 오해 없이 이해될 수 있는 글만 남기려다 보니 멈춘 것이었다. 그리고 수없이 이걸 글로 쓸까 말까 고민한 글감들 앞에서, 현재로는 실제로 명상에 대해서는 글로만 공유하는 것을 멈췄다고 말했다.


리듬정렬™은 명상의 내면 경험과 달리, 중심을 잡고 살 때 삶의 의미, 몸의 신경계 반응 등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말만 하려는 중이다. 그래서 리듬정렬™ 관점에서는 더더욱 "내면 중심을 잡으면 다 잘 살 수 있다~~ 와~~!"하고 떠들기 쉬운데, 이 말을 하려면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건 삶을 구조로 이해하는 태도다.


나는 요즘 삶의 많은 현상을 구조로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이 방식을 택하면 이전에 주관적으로 '내면의 중심을 잡고 살라'고 설명할 때보다 훨씬 더 삶을 이해할 여지가 늘어나고, 더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찾기가 좋아지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이 방식의 단점은 용기와 위로가 되는 접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내가 찾은 삶을 이해하는 방식 중, 가장 근본적으로 존재가 무너지지 않도록 설명해 줄 수 있는 해석 방식이라 공유한다. 공감이 되는 분들만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리듬정렬™에서는 이번 생의 삶을 누구나 가진 구조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삶을 살아내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 구조라는 것은, 타고난 재능, 자원, 가정이나 주변 환경, 내가 겪는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봐 간단히 말하고, 기회 닿는 대로 보충 설명을 할 건데, 이런 구조는 운명론도 아니고 카르마도 아니다. 운명론과 카르마는 기본적으로 이상한 전제조건을 갖고 있는데, 우리가 겪는 생의 경험에 우열이 있다는 것이다.


운명론, 카르마를 떼어놓고 봐도, 우리가 에고의 집착으로 나에게 맞지 않는 구조를 좇아 자신을 소모시키고 갉아먹고 있는 것도 사실 많은 경우 경험에 우열이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이 착각을 머리 차원에서 인지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자꾸 현실에서 벗어나 뜬구름 잡는 선문답을 흉내 내려 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신경계는 아직 충분히 경험으로 각인시키지 못했는데, 머리로만 도덕, 옳고 그름을 내세워 '경험에는 우열이 없어'하고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면, 나중에 그림자가 튀어나와 강제로 통합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문장이 오해 없이 전달될 수 있을 때까지 기회 닿을 대로 다른 설명을 찾아보겠다.




드디어 오늘 제목에 맞는 말을 해보자.

리듬정렬™에서 <나는 반딧불> (황가람) 노래 가사는 왜 구조적 모순을 보이는가.


이 노래는 별이 되지 못해도 반딧불로 빛나도 충분히 괜찮다는 위로를 전한다.


그런데 별과 반딧불 대비가 애초에 구조적 모순이라는 것이다.

별은 위에 있고 크고 더 가치 있는 경험이고,

반딧불은 아래에 있고 작고 덜 가치 있지만,

내가 별이 못되었지만, 그런대로 나도 반딧불로, 개똥벌레로 빛나며 잘 살아보겠다는 말이다.


(황가람의 노래가 아니라) 이 노래 가사로만 보면, 이미 별이 되지 못한 존재로 존재가 깎인다.

리듬정렬™에서는 모두 고유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특별한 게 아니라 고유한 것이다.

그냥 다르다.


난 우리가 겪는 생의 경험의 종류를 헬스장 기구로 비유한다.


헬스장에서 천국의 계단을 하고 있는 존재는 벤치프레스나 러닝머신을 하고 있는 존재보다 우월한가?

그냥 눈앞에 지금 비어있는 기구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지금 내 몸 상태에 가장 맞는 운동이 러닝머신이고 벤치프레스일 수도 있다.

그 운동을 다 끝내면, 헬스장 기구 상황과 내 몸의 상황에 맞춰 다른 기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별도 아니고 반딧불이도 아니다.

우리는 지구에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살아가는 몸뚱이를 갖고 태어난 존재다.

별이라면 애초에 우주에 있지,

굳이 이렇게 온갖 저항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지구에 태어나서 이런저런 경험을 할 리가 없다.


농담처럼 던지지만,

사실 '몸뚱이가 중요하다'는 말은, 앞서 말한 10년의 시간을 통째로 살아낸 힘으로 남긴 문장이다.

이런 언어를 평생 정리한 사람들이 몸미학, 현상학자들이고,

내가 자꾸 인지과학적 용어로 '신경계 각인이 끝나야' 삶의 다음 페이즈로 넘어간다는 것도 같은 맥락의 말이다.


지구에서 몸뚱이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경험은 우열이 없고, 그저 내 몸뚱이가 겪는 구조 속에서 내게 가장 필요한 경험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

이 말이 의도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다른 글에서 계속해보겠다.



아참...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나는 반딧불> 노래를 부른 황가람 가수는 그의 구조 속에서 통과한 삶의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의 생의 구조적 과제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그 과제를 아주 멋지게 해냈다. 그의 노래는 지금 위안이 필요한 구조를 통과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생을 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같은 순간 닿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 혹은 필요한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하나의 프레임을 공유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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