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통한 성취: 정확한 몸의 직관 기르기

by 헤스티아


요즘 나는 나에게 맞는 일과 맞지 않는 일을 몸에서 아주 명확하게 구분해 낸다.

나에게 맞는 일은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 내가 하는 작업들은 현실에서의 정합성, 그리고 구조적 적합성을 여러 번 다른 각도로 테스 해도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올 때 비로소 한 발 진척이 느껴지는 일들이다.

반복을 하되,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정교한 변주를 통한 테스트들을 여러 번 해내는 일이라,

어찌 보면 지루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계속되는 몰입에 에너지 소모가 꽤 크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 리듬이 도착할 때마다 온·오프로 이어가는 흐름으로 살아낸다.


반대로 나에게 불필요한데도 불안이나 에고의 집착 때문에 붙들고 있는 일들은 몸이 먼저 반응한다.
몸은 그 일을 뱉어낸다.


관심 있는 주제를 연구할 때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3천 권이 넘는 책과 논문을 읽어도 괜찮다.
하지만 불안이나 에고의 집착으로 붙들고 있는 책은 펼치는 순간부터 뇌가 작업을 거부한다.
곧바로 로그아웃에 가까울 정도로 잠에 빠지거나,
글자를 읽고 소화하는 과정을 토해내거나,
몸 전체가 미루기 상태로 꼼짝 못 하고 늘어져있기도 하다.


다들 그런 경향이 있겠지만,

몸이 더 정확해지면서 몸의 반응이 너무 정확해진 것이다.

내게 필요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능력이 강화되고,

내게 필요 없는 일을 욕심으로 붙들기 위해 하는 일들은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내 몸은 계속 변화하면서 신기한 반응을 보이곤 하기에,

이런 상태가 영구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단 현재는 그렇다.


예전에는 이걸 의지 부족이나 게으름으로 해석했다.
지금은 아니다.


태극권과 명상을 통해 오랜 시간 인테로셉션(interoception)과 그에 대한 메타인지 능력을 고밀도로 훈련해 오면서 나는 이 ‘미루기’가 몸이 정확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metastable state라는 걸 알게 되었다.

즉, 겉으로 보기엔 정지나 후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부 조건을 미세 조정 중인 상태다.


그래서 이제는 몸이 거부하는 일을 “내가 부족해서 못 하는 일”로 보지 않는다.
그건 대개 에고의 불안이나 집착이 걸려 있는 지점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가고 싶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자책하는 일, 머리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내가 매번 신경계 각인이 결정한다고 말하는 이유 때문이다.

반대로, 지금 내가 미루기에 대한 자책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 건, 내가 머리로 상황을 긍정해서 다르게 봐서 그런 것도 아니다. 몸과 신경계 반응이 자책이 작동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확해져서, 그 결과로써 상황을 인지해서다.


이걸 알아차리고 나니 굳이 그 일을 붙들고 있지 않을 만큼 훨씬 자유로워졌다.

그 결과 내 인생의 방향을 잡는 일이 과거보다 훨씬 덜 막막해졌다.
판단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제는 ‘몸의 직관’이라 불러도 될 만큼 빠르고 명료하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 있다.

지금의 이 정확한 몸의 반응,
몸과 팀을 이루고
그 신뢰를 유지하는 상태는
단지 태극권이나 명상 같은 인터로셉션 훈련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도전의 개수가 많았고, 실패를 많이 겪었다.
그 실패들이 신경계에 충분히 각인되면서 불안과 집착으로 붙들던 길들이 자연스럽게 가지치기되었다.

인지과학적으로 말하면, 이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계 학습의 문제다.

몸은 실패를 통해 “이 길은 나를 살리지 않는다”는 정보를 의식보다 먼저 저장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실패가 두려워 완벽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는,
내가 수습하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고 실제로 실패를 해보라고.




다만,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이 말은 ‘린 스타트업 전략’이나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듯이, 빠르게 실패하면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아니 이 길은 사회적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성공의 방법은 일반화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구조를 좇다가 신경계나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삶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자꾸 존재를 살리기 위한 신경계 학습과,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둘째,
실패를 살아내고 태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 과정이 내 존재를 갉아먹을 정도로 파괴적이라면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의 문제다.


그럴 때는 무너지기 전에 멈춰서
이 길이 정말 나를 위한 길인지,
아니면 불안과 에고의 집착이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묻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해서
나를 죽이는 구조를 붙들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제는 나를 살리는 방향으로
어디까지 놓아도 되는지.


이 질문들을 마주하는 것 역시 리듬정렬™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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