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정렬에서 말하는 인생에서 무의식의 의미

by 헤스티아

리듬정렬과 명상 모두 내면의 중심으로 돌아가는 작업을 다룬다.

그런데 최근 나는 이 둘을 구분해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리듬정렬과 명상 모두 내면의 중심과 연결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중심 밀도가 높아지면

삶이 바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리듬정렬을 좀 더 넓은 의미로 쓴다는 것은,

여기서 다루는 무의식이나, 내면 이야기의 범주를 제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신 내가 리듬정렬이 되고 있는지를 스스로 살펴볼 수 있는 지표도

삶의 현실에서 직접 일어나는 일들, 신체 반응으로 간접 확인할 수 있는 범주,

학계 용어로 환원될 수 있는 범주까지만 다룬다.


리듬정렬로 제한해서 설명할 때의 장점


이런 태도를 취하면,

적어도 내가 겪고 있는 현상이 가시적이고,

비교할 수 있는 스케일이 오픈되어 있어서 덜 공포스럽다.


인간은 불편이나 불안, 공포 그 자체보다

그것을 누구나 겪고 있는 흔한 일로 받아들이면 좀 덜 힘들어하고,

나만 그런가 싶은 고립감이 실제 현상 그 자체를 더 힘들게 만든다.


그렇다고 누구나 겪고 있다고 옳은 것도 아니고,

그런 상황을 무조건 감내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리듬 정렬의 전제 조건


인간의 삶은 의식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의식적 선택 + 무의식적 반응의 합으로 구성된다.


이건 명상으로 말하든, 리듬정렬로 말하든 동일하다.


명상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훨씬 깊은 차원을 다 포함하지만,

리듬정렬에서 다루는 무의식은 신경계로 확인 가능한 범위까지만 말한다.


신경계 반응을 넘어서는 의식 상태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개인의 수행 경험 훈련 수준 통합도에 다라 편차가 크고 보편적, 재현적 설명이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는 것이다.

대신 이게 전부가 아니라 어디서 언어가 멈추는지 범주를 의식하고 있을 필요는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경계는 원인이 아니라,

무의식을 가장 예민하게 드러내는 지표 중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면,

내 인생의 중심을 잡는 길에 닿지 못하고,

계속해서 신경계 증상에 대한 땜빵식 대안으로 처리하게 된다.


생활에 불편을 줄 정도의 신경계 증상이 지속되면,

현대의학의 도움을 충분히 받을 필요도 있다.


그런데 그게 본질이 아니라, 대증 처방이라는 것도 많이들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신경계 증상에 대한 처방을 논의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 건 전문가의 영역이고,

우리가 필요한 건, 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점이다.


내 삶은 내가 책임지는 거지, 전문가든 누구든 외주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리듬정렬은 내 삶을 책임지기 위해 신경계로 확인가능한 무의식까지 다루는 삶의 태도다.



리듬 정렬은 우리가 몸으로 알 때까지 에고의 집착을 태워내고 더 넓고 통합된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예전부터 나는 불어의 savoir와라는 connaître 동사를 구분해 왔다.

꼭 불어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몇몇 언어에서는 '알다'라는 동사를 구분해서 쓴다.


영어와 한국어는 그냥 문맥에서 구분해 쓰는 것 같다.

영어에서도 의미 구분이 필요하면 표시는 한다.


I know him. (이 맥락에서는 불어의 connaître 에 가까움. 실제로 내가 개인적 체험 속에서 알 때)

I know who he is. (이 맥락에서는 불어의 savoir에 가까움. 실제 접점은 없고, 그냥 누군지 아는 것. 연예인과 나의 관계라고나 할까...)


다만 동사 자체가 구분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불어의 savoir는 인지, 의식 차원에서 아는 것.

connaître는 경험, 감각, 체험 쪽으로 아는 것을 구분한다.


몸미학을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점점 더 connaître 형식의 앎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우리 삶에서는 에고의 집착을 connaître 형태로 몸으로 알아차릴 때까지 문제가 반복된다.


이 말을 신경계 언어로 표현하면,

신경계에 완전히 각인되어 다른 존재 상태가 되어야지만 connaître로 안다가 된다는 것이다.


언어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정의하고 공유해서 쓰기 위해 이런저런 맥락의 표현을 계속 의도적으로 가져오고 있는데,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을 일상어로 치환하면 단순하다.


1)

내가 흑역사라는 걸 깨닫고 이불킥을 한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충분히 알았다는 것이다.

알지 못하면 이불킥도 안 한다.

계속 알지 못한 상태에서 흑역사를 생성할 뿐.


2)

또는 에고의 집착을 신경계 각인 차원에서 태워버리는 것이다.

누구나 할 만큼 하고, 미련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열리지 않은 길, 기회, 경험이 아주 많았을 것이다.

이만큼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러면 한동안 계속한다.

그런데 그 길이 자기에게 필요한 길이라면, 다시 힘내서 계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에고의 집착을 붙들고 있는 길이라면 진짜 미련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보면,

그래도 열리지 않는 길 앞에선 스스로 안다.

아... 내가 괜히 이 길에 집착하고 있었구나...


리듬정렬은 의식과 신경계 반응이 더 이상 충돌하지 않게 만드는 기본 작동 상태를 지향한다.

이 정도가 되면 신경계 각인이 일어날 정도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본다.

이건 앉아서 의지로 다룬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때로는 살아내고 실패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존재 변화다.


여기서는 우리 삶에 대한 전제가 하나 필요하다.

우리의 삶은 이번 생에 우리 에고가 가진 집착을 떨쳐내고, 좁은 시야로 갇혀있던 나의 믿음을 태워내, 좀 더 넓고 통합된 존재가 되는 것으로 향한다.


이걸 에고가 워낙 싫어하고, 의식적으로는 잘 안 하니까, 우리의 삶은 신경계 차원에서 각인이 일어날 때까지 반복해서 그 문제로 돌아오게끔 한다. 무의식이 삶에서 의식적 에고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에고가 무엇을 집착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신경계 차원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스스로 살아내든지,

때로는 강제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의미를 붙여 이해하기만 해도,

신경계 차원 각인 변화가 전혀 의미를 모를 때보다는 덜 고통스러워진다.


그래서 리듬정렬에서 다루는 무의식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신경계 차원의 자동 반응과 재학습 과정까지만을 다루고, 경험 반복을 통해 변화 여부 확인 가능, 훈련 수행 없이도 삶 속에서 검증 가능한 부분으로 한정해서 앞으로 얘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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