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렌느와 갱스부르
이 말을 하려고 찾아왔어. 나 이제 그만 떠난다고.
남불의 11월 7일 토요일 오후 세 시는 17도. 바람이 많이 불어서 빨래줄이 휘청거리고 보도블럭 위로 낙엽이 이불처럼 끌려다닌다. 이 지방에 사이프러스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지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하늘을 향해 길고 가늘게 쭉 뻗은 사이프러스는 아무리 센 지중해 바람이 불어도 고고한 자세를 지키며 고양이 꼬리처럼 아주 가끔씩 살랑거리기만 한다. 나뭇잎을 떨구거나 온몸을 흔들며 바람의 드나듬에 환호하는 나무들은 전부 플라타너스이거나 참나무다. 거리에 쌓인 낙엽의 주인도 사실은 얘네들이다. 사이프러스는 잎을 떨구지 않는다. 봄바람이 불 때 지독한 꽃가루를 날릴 뿐이다.
지난 주말에 역자 후기를 넘겼으니, 또 한 권의 번역이 내 손을 떠났다. 이번 책은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에 대한 이야기였다. 갱스부르가 남긴 노래 중 내가 이맘 때, 그러니까 가을 바람이 불어 머리칼이 흐드러지고 거리의 낙엽에 뒤통수를 얻어맞을 때면 저절로 흥얼거리는 노래는 < 이 말을 하려고 찾아왔어. 나 이제 그만 떠난다고. Je suis venu te dire que je m'en vais.>다. 이 노래를 갱스부르는 1973년 말 직접 만들어서 불렀다. 가수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갱스부르는 당대 최고의 작사, 작곡가였다.
"이 말을 하려고 찾아왔어. 나 이제 그만 떠난다고.
눈물 보인다고 달라질 일은 없지.
베를렌느의 시에도 나오잖아.
모진 바람이 불고,
이제 떠나야겠다고.
그 말을 하러 왔다고.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서 울지는 마.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되니
숨이 막히고 창백해질 뿐이야.
후회할 줄 알면서도 떠난다는 말을 하러 왔어.
너를 사랑했으니까. 맞아. 그런데."
1973년은 갱스부르 생애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1968년에 제인 버킨을 만나 영화를 함께 찍고, 그녀를 위한, 그녀와 함께 부를 노래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한 해 전 브리지트 바르도와 짧고 뜨거운 연애를 할 때 함께 불렀다가 바르도의 남편 귄터 작스의 협박에 못 이겨 미처 발표하지 못했던 노래 <je t’aime… moi non plus>도 있었다.
1973년. 그해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은 딸 샤를로트를 낳았고, 노르망디 쪽에 여름 별장을 장만해서 파리와 노르망디를 오가며 가만가만하게 지냈다. 샤를로트는 예쁘게 컸고(이 아이는 나중에 부모 못지 않게 유명한 배우이자 가수가 된다. 아빠의 음악성과 엄마의 늘씬한 키를 빼닮았다.), 갱스부르는 제인 버킨이 영국 작곡가 존 베리와 사이에서 낳은 딸 케이트(이 아이는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7년 전 겨울 투신 자살했다.)를 친딸 못지 않게 애지중지 길렀다. 생에 가장 평온한 시절에, 갱스부르는 그의 가장 쓸쓸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화양연화와 다름 없는 시기에 왜 이런 궁상맞은 노래를 발표했냐고 누군가 묻자, 갱스부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는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매사 술술 풀릴 때는 오히려 결별과 찢어지는 마음을 노래해야 해. »
갱스부르는 19세기의 저주 받은 시인, 세기 말의 시인으로 유명한 폴 베를렌느의 시 <가을의 노래>를 읽다가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과연, <가을의 노래>에서 20세기의 음악인 세르주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나 이제 떠나리,
모진 바람 속으로.
그 바람이 낙엽처럼
나를 데려가리.
이리, 저리로."
이 시는 베를렌느가 1866년에 발표한 첫 시집 «토성 시편 »에 들어 있다. 세기 말의 우울을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감수성으로 마치 체념하듯, 일기 쓰듯, 중얼거리듯 쓱쓱 적어 내려간 이 시집은 시간이 흐를수록 인기를 더했고 몇 년 후 베를렌느는 당대 프랑스 문단에서 <시의 왕자>로 불리게 된다. 덕분에 20세기 초, 한국에 프랑스 문학이 하나 둘 번역되던 시기에 베를렌느의 시가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번역된다. 양주동과 김억은 이 시를 <가을날 구슬픈 바이~올린 소리…>라고 번역했다. 당시 글을 읽을 줄 아는 한국, 아니 조선의 독자들은 이 소박한 번역시들을 읽으며, 서양 악기의 소리를, 상티망탈이라는 야릇한 단어를 되뇌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를렌느는 지독한 사랑쟁이였고, 패륜아였으며, 술꾼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홀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이 폭력성은 동성 애인이자 천재 시인 랭보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보다 9살 어린 아내 마틸드를 두고도 사촌 누이 엘리자를 향한 연정에 대해 당당했고, 어머니와 랭보에 대한 폭력, 살해 위협으로 형을 살고 나와서는 종교에 귀의했다가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하면서 정신을 차렸나 싶었지만, 당시 17살이던 소년 제자 뤼시엥 레티누아와 또 사랑에 빠졌다. 몇년 후, 뤼시엥이 장티푸스로 세상을 뜨자, 베를렌느는 술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행려병자처럼 살았다. 하지만 당시는 세기말. 그의 광기, 폭력, 알콜 중독, 경계를 모르던 사랑, 기행… 이 모든 것들이 ‘저주 받은 시인’의 품격으로 치장되던 세월이었다. 방랑의 천재 시인 랭보가 그랬고 성병을 감기처럼 달고 산 보들레르가 그랬듯.
1991년 다섯 번째로 찾아온 심장마비를 이겨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갱스부르. 그의 말년은 어디로 보나 베를렌느를 닮아 있다. 제인 버킨과 1980년에 헤어지면서, 아니 헤어지기 몇 년 전부터 갱스부르는 ‘갱스바르’라는 괴팍한 자아를 스스로 만드는데, 하이드 씨에게 자아를 완전히 내줘버린 지킬 박사처럼, 프랑스 대중 음악계의 천재이자 다정한 아버지 갱스부르는 ‘갱스바르’라는 얼터 에고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빼앗긴다. 이건 어쩌면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 놀이였을까. 아니면, 갱스부르라는 작자의 본성이었을까.
궁금함은 여전히 남고, 나는 그저 그가 부르고 떠난 노래를 읊조릴 뿐이다. 참, 세르주 갱스부르의 본명은 뤼시앵이었다. 베를렌느의 요절한 마지막 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