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마음 #내가낳았나 #내가알던내아이는어디에
"아, 또, 왜!"
"아니 내가 하려고 했는데!"
"알겠다고."
차오르는 마음을 겨우 다독여 글로 적어본다.
화가 나고, 그 속에 자리한 슬픔을 찾기까지 또 한참이다.
어쩌면 난 계속해서 슬픈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나가면 이 시간이 웃음으로 승화될 수 있으려나. 그렇게 되겠지, 나도 곧.
엄마라는 존재가 끝없이 사랑을 주는 사람인 것 같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내내 사랑을 받기도 한다.
난 그랬다. 이 집안의 모든 남자들에게서 사랑과 귀히 여김을 받았다.
물론 나의 삶과 마음을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넘치게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그중 가장 달콤했던 나의 첫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몹시 슬프다.
화가 나고, 아이가 밉다가도 슬픔이 찾아온다.
은유를 처음 낳았던 날이 내게는 아직 선하다.
남편이 출장 중이어서, 옆 동에 사시는 시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향했던 아침.
남편이 없다는 것이 새벽에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병원에 막상 도착하니 마음에는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겨,
내내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만나기까지 기도하면서 진통을 견뎠던 시간.
아침 8시 전에 도착해서 분만실로 향해 (1월 초였기 때문에 전쟁통 저리 가라 했던 분만실)
초산 모라기에는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아이를 만나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유도제를 최소한으로 쓰고 싶고,
가족분만실을 사용할 것이고,
무통약을 사용해 달라고 했다.
담담하게.
보호자는 시어머니였지만, 곧 남편이 한국으로 올 것이라는 소식에 또 담담히 기다렸다. 진통을 하면서.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아이를 만났다.
(진통이 약했다는 것은 결코 아님. 절대 그렇지 않다.
난생처음으로 이렇게 힘을 쓰는 순간을 처음 겪었다. 인터넷을 통해 힘을 주는 방법을 익혔지만,
막상 그 순간에는 최선만 다할 뿐 어떻게 힘을 주어야 하는지는 몰라서,
출산 후 담당의사를 만난 당시에 의사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고 놀랐다.
모든 실핏줄이 터져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축하하느라 방문한 지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출혈도 생각보다 많았고, 심하게 부어올라서 추가 검사를 더 했다.
경험이 없고, 요령을 몰라 최선만 다했던 출산의 기억.
순산도 출산이어서 진통의 고통은 어마어마했다.)
그날 나는 내 담당선생님이 퇴근하기 전 아이를 분만하고 싶었고
마지막에 빠른 진행 덕분에 순적하게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울지 않았고, 눈을 깜빡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후처치를 하는 동안 잠시 가슴에 올려진 아이는 잠시 울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또 눈을 깜빡이다 했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신기했고, 놀라웠다.
태어난 나의 첫 아이는 의사 선생님과 분만실 간호사분들이 놀랄 정도로 꽃미남이었다.
그때 분만실에 있던 의료진들이 한 번씩 모두 쳐다볼 정도로.
신생아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에도 수십 명을 만나는 의료진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신생아실에서도 조리원에서도 꽃미남이라는 소리를 내내 들었던 내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 내내 키우기가 버거운 예민한 기질의 소유자였지만 이 아이의 달콤함에 나는 사랑에 빠진
엄마가 되었다.
이 아이에게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고, 세상이 이 아이를 상하게 할까 두려웠다.
나처럼 괴로운 세상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고, 나처럼 거친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첫 아이여서 실수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아서
어느 부모와 아이가 그러하듯 서로 고생이다 싶은 순간은 아직도 여전하다.
그래도 내 아이는 달콤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서 옷도 아무거나 입지 않았고, 자기 주관도 분명해서 여간해서는 털털하게 넘기는 일이 없었지만 이 아이가 내게 삶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예방접종을 하면 열이 나기 마련인데, 그 열이 혹시 다른 이유일까 봐 다시 병원을 찾는 유난스러운 엄마였고,
아이가 장염이 걸려 설사를 할 때면 내가 물병을 꼼꼼하게 닦지 않아서일까 싶어서 자책하는 엄마였다.
시중에 파는 이유식은 아이에게 어떤 해를 미칠까 싶어서 육수와 치즈, 토토리 묵마저 모두 핸드메이드로
자처해서 고생하는 길을 택한 엄마였다.
그래서 나의 육아는 참 달콤하고도 고생스러웠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해, 한 해 자라 4학년이 되었다.
발 크기가 나와 비슷해졌다. 코 아래 털이 눈에 슬쩍 보이기도 했다.
핸드폰과 인터넷 게임에 빠져있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느 날은 가족들 모두가 외출하는 주말이면 자기는 혼자 집에 있겠다고도 했다.
친구들의 연락에 끝없이 반응하면서도 자신의 할 일과 규칙을 말할 때면,
여태껏 보지 못한 눈빛과 말투를 보이기도 했다.
'어, 얘가 왜 이러지'
싶어서 달래기도 하고 강하게 훈육을 하기도 했다. 정도가 심한 날에는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회초리를 들고 나면 그 후로 며칠을 내가 더 고통스러웠다.
아이의 회초리 자국이, 내가 맞은 것보다 더 아팠다.
아마 올해 여름방학 전후였을 것이다.
아이가 정말 달라졌구나, 싶었을 때가.
이제껏 그랬듯 까다로운 기질의 한 모습이 아니라고 느낀 때가 몇 개월 전이다.
게임과 티브이에 과하게 몰입하고 제한을 둘 때마다 격분했다.
생활의 크고 작은 부분 모두 부딪혔다.
평소 하던 규칙과 질서를 임의로 넘나들었다.
말투와 눈빛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다.
방문을 닫고 친구가 더 중요해진 건 예삿일이었다.
아이를 떠나보내기 위한 준비라고 한다.
사춘기를 지나서 아이를 독립시키는 것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한다.
그래서 부모와 육체적, 정서적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라고.
엄마인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아직 이 아이를 품에 떠안고, 내 안에 머물게 하고 싶어서 이렇게 슬픈 것일까.
알고 있었지만 아이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실제로 와닿으니 마음이 아픈 것일까.
하루하루 이 아이와 살 맞대고 아이의 냄새를 맡고,
모든 시간을 함께했던 그 시기가 정말 끝이 났다고 생각하니 몹시 슬프다.
분리불안은 엄마에게 있다고 하는, 티브이에 나오는 육아코치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다.
그래, 내가 분리불안 엄마다!
하루하루 아이와 달콤하게 보냈던 날들을 뒤로하고,
하루하루 아이와 전쟁같이 보낼 날이 앞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자꾸 선을 넘으려 할 때, 이것이 경계임을 알려줄 때마다,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혼잣말이라면서 구시렁거리는 아이의 그 모든 불만을 모른채하고
방에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나오지 않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를 눌러야 하는 시간이 내 앞에 얼마큼 있을지 가늠도 안 된다.
시작이 벌써 이런데, 앞으로 네가 중학생이 되면 우리 사이 괜찮을까?
무지하게, 담담하게 싶다.
그래, 그렇지 하면서 흘려보내고 싶다.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마음속 켜켜이 쌓아둔 감정은 어디에 도망가지 않는다.
더 큰 괴물이 되어 다시 불쑥 나타나기 전에 글로 담담히 적어 내려 가 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그저 기다리고, 기도하는 엄마이기로...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너를 맡기고,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려보기로..
근데, 난 하염없이 슬프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