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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Mar 18. 2024

찬란한

프라하 가족 여행


비 내리는 프라하 공항은 우중충했다. 겨우 매칭된 우버 기사를 기다리며 하얗다 못해 시뻘건 핏줄을 드러낸 허벅지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괜히 넘어온 건 아닐까 살짝 짜증이 났다. 

‘아름답고 맑은 파리에서 몇 시간 날아왔을 뿐인데 이렇게 칙칙하고 무거운 공기라니.’


되도록 오랫동안 파리지엔느로 살고 싶었지만 어쩔 방도가 없었다. 자마미섬으로 떠났던 첫 해외여행의 좋은 추억에서 한 단계 발돋움한 온 가족의 두 번째 해외여행이자 첫 유럽여행이 나를 빼놓고 막 시작된 참이었다. 프라하, 빈을 거쳐 부다페스트에서 마무리하는 일정으로 6일치곤 빡빡한 여정이었지만 함께하는 유럽은 처음이라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파리에서 한 달 살기를 하던 나는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돌려 악명 높은 유럽 저가 항공기 안에 몸을 구겨 넣고 2시간을 날아 몇 시간 늦게 체코 프라하로 합류해야 했다.


우버 기사는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고 공항을 빠른 속도로 벗어나 시내로 진입했다. 규격에 들어맞는 색채 없는 옛 건물에서 동구권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났고 무채색의 건물이 회색빛 하늘에 녹아들어 한없이 가라앉았다. 개중에 무리에서 뒤틀린 알록달록한 소수의 건물을 보자 오히려 불편한 감정이 배꼽 너머에서 소용돌이쳤다.


동생이 왓츠앱으로 공유해 준 주소에 다다랐지만 도저히 에어비앤비에서 멀끔한 사진으로 우리를 유혹하던 숙소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동네 주민이 모두 출근이라도 한 건지 인적이 드물었고 사람이 사는 동네치곤 활기가 없었다. 슬슬 불안해졌다. 그나마 있는 음식점은 전부 문을 닫았고 그 흔한 편의점이나 마트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는 익숙한 다리가 눈에 띄었다. 

“00아!”



한바탕 상봉식이 벌어졌다. 우린 얼싸안고 환호했다. 직항도 아니고 도하에서 환승하는 일정이라 내심 걱정했는데 이미 구시가지를 한 바퀴 돌고 시장에서 파는 프라하 명물 굴뚝빵을 먹고 냉장고 자석까지 야무지게 구매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를 만난 것이었다. 과연 여행자의 유전자가 모인 집단답다. 1시간 전까지 장대처럼 쏟아졌던 비를 뚫고 구시가지 탐험을 강행했다가 이대론 감기에 걸릴 것 같아 우버를 타고 막 돌아로던 길이란다. 어쩜 이렇게 딱 마주쳤을까.

     

갑자기 해가 떠오른 듯 세상이 환해진 듯 마음속 먹구름이 개었다. 첫인상을 파리와 비교해서 그렇지 프라하는 내 첫사랑이나 다름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인생 최초로 구매한 여행책이자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꿈꾸게 해 준 도시로 한 번도 와본 적 없지만 어디든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아담한 프라하의 지도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게다가 파리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매일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돌아다니는 일상에 점점 외로워지던 무렵이었다.


“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프라하 다 못 보고 떠나게 될 거야.”               

다음날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새파란 하늘과 쨍한 태양이 먼저 나와 우릴 재촉했다. 해 뜰 때 나와서 돌바닥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걸어 다녔다. 고색창연한 동부 유럽이 그대로 보존된 프라하성 앞 광장에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프라하 성의 280개 계단을 오르내렸고 (등줄기를 타고 끊임없이 땀이 흘렀고, 숨이 쉬어지지 않아 명상하듯 호흡해야 했다) 


"이대론 아무 데도 못 간다."

카페인 수혈이 절실했다. 한국인 사이에서 유명한 명소나 다름없는 스타벅스에서 목을 축이다가 사복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는 소매치기를 구경하는 흥미진진한 경험을 했고, 통행료를 받는다는 황금 소로 앞에서 성을 냈다가 구시가지로 진입해 시계탑을 구경하고 얀 후스의 동상에서 사진을 찍으며 프라하의 봄에 관한 역사적 설명을 읽었다. 


이어지는 강행군 속에서 배고프다고 눈빛으로 보채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히래랑 다니면 굶는다니까’를 두세 번 듣고 나서야 골목길을 배회하다가 감으로 찍은 식당에 들어가 식탁 가득 메뉴를 잔뜩 늘어놓고 끊임없이 빵을 리필했다. 영양분을 공급하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빨리 둘러봐야 한다는 강박이 우습게만 느껴졌고 한껏 느긋해져서 '구시가지 천천히 산책하다가 우버 불러서 집에 돌아가자. 내일 다시 나오면 되잖아' 한가로운 일정으로 변경했다. 안 그래도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피곤해 보이는 눈들을 보니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둘째 날이 밝았다. 부슬비가 내리는 차분한 아침이었다. 급변한 날씨는 둘째치고 전날 마트에서 사 온 물이 문제였다. 투명,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형형색색 페트병 앞에서 고민하다가 대충 파란색을 집어왔는데 탄산수였다. 아빠는 탄산수로 캡슐커피를 내렸고 엄마는 탄산수로 누룽지를 끓였다. 일명 '공포의 탄산수의 저주' 사건으로 우리끼리 지금까지도 웃으면서 꺼내는 이야기지만 유럽 여행 내내 우리가 구매한 물은 모조리 탄산수였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데 어디를 가야 할까?'

우버를 타고 20분 정도 달리면 스트라호프 수도원의 도서관이 있었다. 전날 너무 오래 걸어 다녀서 더 이상 걸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던 차에 검색하다가 발견한 곳이다. 비 오는 날 수도원만큼 완벽한 여행지도 없을 것이다. 넘실대는 햇살마저 허락하지 않을 수도원 특유의 엄격하고 절제된 이미지와 우중충한 하늘은 또 어찌나 완벽하게 어우러지던지.


스트라호프 수도원은 아름다운 도서관과 유서 깊은 양조장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중세시대엔 수도원에서만 술을 만들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명맥이 이어진 곳은 유구한 역사와 맛을 자랑하며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완벽한 브랜딩이 이뤄지고 있다. 도서관을 보러 갔지만,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판다기에 도서관 입구만 들어갔다가 냉큼 식당으로 향했다. 입장료가 비싸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악에게 넘어가 버렸다. 

"아니, 유럽에서 도서관은 지겹게 봤잖아. 비슷하겠지."
"빈으로 넘어가면 도서관 또 있어. 걱정하지 마."


400년 전통이라니, 무려 4세기 동안 맥주를 만들어 왔다면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제대로 발효된 맥주는 마시고 나면 엔젤링이 아주 아름답고 규칙적으로 남는다네.” 

아빠가 발휘한 틈새 지식을 확인하기 위해 기다란 유리잔에 나온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투명한 유리잔을 따라 천사의 광류같은 링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스테이크와 으깬 감자, 폭립, 햄버거 그리고 계속해서 추가되는 맥주잔과 앤젤링, 프라하 마지막 날 수도원에서 만난 이른 저녁은 근 한 달 동안 먹은 식사 중 가장 화려하고 완벽했다. 


수도원에서의 한 끼는 모네가 그린 점심식사의 한 장면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나무틀 창문 밖으로 잿빛 하늘이 걸렸고 대조적으로 더욱 아늑하고 따스한 내부에서 앤젤링이 아름답게 남는 맥주를 마시며 한껏 취기가 올라 우린 명화 속 사람들처럼 발간 볼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설사 스테이크가 오버쿡 되었더라도 '이 훌륭한 음식이란'하며 찬양하며 맥주잔을 들어 올렸을 것이다. 걷다가 지쳐 우버를 타고 수도원에 가자고 결정을 내렸을 때 400년 된 양조장이 있는지 몰랐던 사람들 치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해냈다.




오늘은 걷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뚜벅이였다. 수도원에서 또 걸어서 구시가지로 돌아와 어느 가게에서 젤라또를 먹으면서 에너지를 재충전했고 프라하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리 아프고 지쳐서 대화할 힘도 없었지만 아무도 숙소로 돌아가잔 말을 하지 않았다. 내일이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대로 프라하와 작별인사를 할 순 없다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답게 밤이 깊어질수록 관광객은 많아졌다. 카를교를 건너면서도 사람에 치여 동상을 마음대로 감상하기도 힘들었지만 이미 맥주에 취하고 낭만에 취해버린 우리는 아랑곳 않고 모든 동상 아래 잠시 멈춰 구경했다.


여느 도시에나 하나쯤 있는 ‘소원을 말해봐’ 랜드마크를 앞에 두고 ‘이런 건 뭐 하려 하냐’는 염세주의적 멘트를 중얼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은 이미 수많은 여행자들이 만지고 간 네포무크 동상의 매끈한 발등을 한 번, 두 번 쓰다듬었다. (아마 괜찮다고 뒤로 빼는 아빠를 동상 앞으로 끌어당겼을 것이다.) 


다리를 건너 카를교가 한눈에 보이는 블타바강 강변에 서서 화려하고 활기찬 여느 유럽의 풍경과 다른 프라하의 야경을 감상했다. 고색창연한, 차분하지만 아름답고, 쓸쓸하지만 로맨틱한 여러 감정과 생각이 섞여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리가 다시 함께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모든 여행에는 끝이 있고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오더라도 지금 곁에 있는 이와 함께일지 막연한 불안감으로 가슴이 울렁거리지만 마음 한 편에서 기대감이 솟아오른다. 아마 네포무크의 맨질맨질하다 못해 닳아서 작아진 발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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