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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8시간전

오래된 노래

내 작은 플리


6년을 다닌 학교를 졸업하고 낯선 교문을 처음 넘어서던 날 언제나 당당하던 두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어쩐지 초라하고 위축되어 보였다. 두 다리가 전에 없이 무겁고 가슴 언저리가 조금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다른 학교로 진학했던 해에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이 외로움이었던 걸까.


교실에서 책상을 붙여 점심을 먹던 친구들, 내 이름을 익숙하게 불러주던 선생님들, 조회 때마다 올라가던 높은 단상, 내달리던 복도, 어디에 음악실이 있고 과학실이 있는지 줄줄 꿰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세계의 1학년이 되어 버렸고 전교생 모두 똑같은 교복에 똑 자른 단발머리였지만 어디에서도 일체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없었다. 억울했다. 6년간 쌓아온 내 업적이 단지 나이 한 살 많아졌다는 이유로 무너지다니.     

겉돌던 마음은 나를 초등학교로 이끌었다.


일찍 끝나는 토요일이면 오전 수업을 마치자마자 버스를 타고 익숙한 교문을 넘었고 이어폰을 꽂고 눈에 익은 곳을 차례대로 훑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걷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어깨가 솟아올랐다. 그때 반복해서 재생하던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의 가사를 아직도 흥얼거리곤 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문득 단 한 곡이 들어있던 내 소중한 플레이리스트가 떠오른다.

플레이 ‘리스트’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테지만, 내겐 백 곡 같은 한 곡이었기에 충분하다고 악수라도 건네고 싶다. '거리에서 울려 퍼질 때면' 어쩔 수 없이 반복해서 재생하던 그때의 내 모습이 보이는 스탠딩 에그의 <오래된 노래> 덕분에 지금도 때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에 타협하며 걷는 방법을 터득했다.

     

외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내 일상은 아주 편리했다. 효율성이 우선시되는 곳이다 보니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규정에 맞춰 준비한 다음 아파트 로비에 내려와 기다리면 픽업 버스가 와서 나와 캐리어를 태우고 이 숙소 저 숙소를 돌아 나와 같은 승무원들을 버스에 가득 채우고 난 뒤 정해진 시간에 사무실에 내려주는 시스템 속에서 살았다. 픽업 스케줄은 숙소 위치와 그 시각 거리의 교통 상태, 비행 전 브리핑 시간을 고려해 개인 매일로 날아오니 얼마나 편한 삶이었겠는가! 개인 수행 비서가 있는 회장님의 삶이었달까.

     

제시간에 준비를 끝마치고 브리핑 룸에 나타나기만 하면 되니 비행 중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을 제외하면 이보다 편한 직장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감내해야 할 부분도 있다. 우리는 유니폼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었고, 귀에 이어폰을 꽂아도 안되었으며 사무실 바깥이라면 어떠한 음식물도 섭취할 수 없었다. 모든 건 dignity. 회사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라는 점을 몇 개월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면 쉬는 날 쇼핑 나가서도 흠칫 망설이게 된다.      


3개월의 훈련 과정을 거쳐 첫 솔로 비행을 겨우 완수한 새내기에게 이러한 규정은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하니 회사의 규제와 감시에 불만을 품고 구시렁거리는 선배들의 목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렵고도 복잡한 면접 과정을 통과하고, 괴로웠던 트레이닝을 수료하고 날개를 달았다면 비행만으로도 즐겁고 만족스러운 일 아닌가?     


우습게도 한 달 뒤, 나는 비행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픽업 버스를 탈 때마다 제발 맨 구석 자리가 남아있기를 바라는 ‘선배’가 되었다. 픽업 버스에 오르자마자 아무도 날 볼 수 없는 제일 구석진 자리에 숨어 몰래 핸드폰과 이어폰을 꺼내 나의 ‘오래된 노래’를 틀었다. 테이프였다면 진작에 늘어나서 엉망이 된 소리가 흘러나왔을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운 좋으면 10분 길어지면 20분 동안 같은 노래를 세 번이고 다섯 번이고 재생할 수 있었다. 차츰 가사가 아스라이 들려올 정도로 몽롱한 진공상태에 빠져들며 단단한 돌덩이를 매단 듯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서서히 풀어지며 긴장이 쑥 빠져나가곤 했다. 때론 노래에 나를 이입해 외로움의 고리를 따라 흘러가면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장기 연애 상대를 만들어 울적함을 즐기기도 했다.

   

어쩌다가 엄격한 시니어가 버스를 함께 타게 되면 내 귀에 꽂힌 이어폰 줄을 바라보며 ‘빼’라는 제스처를 취하곤 했다. 한 번은 이어폰을 빼라며 내게 엄격한 눈빛을 쏘던 시니어와 같은 비행을 한 적이 있었다. 브리핑 룸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정중앙에 앉아있던 그 시니어를 보고 반항적인 눈빛을 보냈던 10분 전 순간이 떠올라 식은땀이 났다. '망했다.'


전부 까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오래된 노래만 재생하면 어딘가에 숨어 있던 순간의 기억이 잉크처럼 마음속에 번진다. 현재의 퇴근길, 플레이리스트는 차고 넘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늘 한 곡만 듣는다. 내일을 향한 설렘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뒤섞인 채 사무실 문을 잠그고 나서는 꺼림칙한 발걸음을 익숙한 가사와 멜로디가 위로한다.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운전석에 앉아 노래로 온기를 아본다. 언젠가 이 순간을 기억하며 싫었던 감정과 좋았던 순간 감정까지 모두 혼재되어 떠오르겠다는 생각에 피식거리며 조심스레 페달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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