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는 극복해야 해
“you can’t sit with us!”
쿵, 심장이 밑바닥에 떨어졌다. 핑크색 셔츠를 입은 그레첸이 날 노려보며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얼마 만에 느껴보는 절망과 두려움인가! 예의조차 포기한 듯 메일 내용은 신랄했다. 한 마디로 ‘이제 너랑 같이 일 못 하겠다’라는 의미였다. 의뢰받은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주관적인 비난과 신랄한 문체, 부당한 요구로 가득한 메일을 한 번 더 읽어봤다. 상대방은 계약한 금액의 절반만 받고 지금까지 쓴 걸 넘기거나 아예 초창기 현장 인터뷰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굉장히 후하게 쳐줬던 조건과 혜택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내 글은 별로고, 주요 포인트를 놓쳤고, 이해 수준이 딸린다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단어들로 나를 저격했다.
나는 계약 파기를 선택했다. 그깟 몇 푼 받기 위해 용납할 수 없는 의견과 일방적인 통보를 수용하고 싶지 않았다. 관계를 생각해서 나름 예의를 차려 메일을 보냈지만, 마지막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남은 건 어디에도 쓰지 못하는 원고지 700매뿐이었다. 나는 계약금도 받지 않고 일을 했다.
“그냥 안 하려고.”
“돈은?”
“치사하잖아! 어떻게 원고를 반만 받고 팔아. 그래도 내 글인데, 가져가서 마음대로 하겠다잖아. 절단내고, 해체해서, 나머지는 소각하겠지. 그럴 바엔 내손으로 휴지통에 버릴 거야.”
“그래, 다 잊어. 또 다른 일 하면 되지.”
“당연하지! 또 들어올 텐데 뭐.”
큰소리 땅땅 쳤지만, 가슴에 콕콕 박혀버린 단어들이 장기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진짜 내가 별로인가? 저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는 수준인 걸까?’
메일 내용을 곱씹지 않으려 해도 내 이름 옆에 ‘을’을 표기해 놓고 입장을 상세하게 나눠 놓은 구절이 침대에 누우면 떠올랐다. 자존심이 상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나서 돈도 받고 사과도 받으려고 서랍을 뒤져 사인했던 계약서를 꺼내 갑과 을의 항목을 조목조목 따지며 반박 메일을 작성했는데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다.
계약서는 허술했다. 어디선가 복사, 붙여 넣기 했는지 8항 다음 6항이 나왔고, 6항의 내용은 중간에 끊겨있었으며 진행하는 프로젝트와 맞지 않게 내용도 뒤죽박죽이었다. 결국 내 탓이었다. 회의실에서 싱글벙글 웃다가 계약서 하나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인한 내 잘못이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계약 파기와 별개로 상대가 뱉은 말은 나를 괴롭혔다.
‘내 글이 그렇게 별로인가? 밥 벌어먹을 생각은 버려야 하나?’
결국 자기 의심으로 번졌다. 나는 한동안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았다.
‘나는 실패한 인간이야. 왜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이지.’
안 좋은 생각만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럴 때 요가원이라도 있었으면 부엌과 방 한 칸이 전부인 공간에서 벗어나 생각의 전환이라도 할 텐데 내겐 작은 탁자와 노트북 한 대가 전부다. 아무도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노력이 잘못된 건 아닐까, 그래서 요가원도 다 내 잘못으로 망한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시골길 드라이브의 묘미는 어둠이다. 자동차 불빛마저 꺼진 들판은 고요한 어둠에 파묻히고, 그르렁거리는 엔진소리가 꺼지면 논에 숨어 있던 작은 생물들도 기어 나와 간 보듯 조심스레 울어대다가 이내 마음을 놓고 우렁찬 울음을 뱉어낸다. 잠깐 있을 생각으로 멈췄는데 이대로 출발하면 누군가의 울음을 방해할까 봐 그대로 시트를 뒤로 젖히고 누웠다. 선루프에 반짝이 별이 액자처럼 걸렸다. 눈물이 흘렀다.
별은 죽어가며 터지는 에너지로 마지막 빛을 발한다. 그 빛은 몇 광년을 떠돌다 이제야 내 눈에 닿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렇다고 딱히 수다스러운 타입은 아니었는데 밖으로 뱉는 대신 머릿속이 잔뜩 흐려질 정도로 몽상과 공상 사이를 헤맸다. 당시엔 학교에서 상장과 문화상품권을 함께 수상했고 나는 문화상품권이 생기는 족족 동네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아이였다. (무척이나 따분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책에서 만난 수많은 주인공에게 스스로 대입해서 대서양을 건너고 무인도에서 살아남고 대저택에도 들어갔다. 그중 <작은 아씨들>을 너무 좋아했다. 둘째 조 마치는 너무나 멋진 여성이었다. 진취적이고 모험심 강하고 글도 잘 썼다. 당돌하고 하고 싶은 일이라면 어떻게든 이뤄내는 모습을 동경했다.
본가에서 가져온 책들 중 그 시절 샀던 책들이 몇 권 끼여있었다. 냄비받침으로나 쓰던 오래된 꿈의 증거를 펼쳐봤다. 조 마치는 ‘여성’과 ‘신인’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결국 출판에 성공했다. 물론 결혼으로 결말을 타협해야 했지만, 출판에 성공한다. 이름에 걸맞게 꿈을 향해 행진(march)하던 주인공은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살면서 몇 번의 실패를 겪게 되는 걸까.
두 번, 세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은데 얼마나 겪어야 끝나는 걸까.’
책을 넘기는 손가락이 유독 거슬렸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동안 손톱이 많이 자라 있었다.
“손톱은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거야.”
손톱 깎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일이지만, 작고 확실한 통제다. 손톱깎이만 있으면 얼마 걸리지도 않고 끝나는 일인데 시작이 어렵다. 그래서 손톱을 깎으면 어쩐지 속이 후련해 진다. 마음의 짐을 하나 내려놨달까? 자라는 속도는 엇비슷 할텐데 매번 '손톱을 깎아야겠다'고 불현듯 알아차린다.
손톱을 깎고, 개운하게 샤워도 했다. 기분 전환 겸 오랜만에 외식에 나섰다. 수입이 줄었으니 메뉴 선정도 신중해야 했다. 메뉴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무난하게 모둠 초밥 A, B 세트를 시켰다. 곁들임으로 나온 우동 국물을 홀짝거리는데 휴대폰 액정이 반짝이며 새 메일이 왔다는 알림이 떴다.
“작가님, 000에서 의뢰가 들어왔는데 가능하실까요? 마감기한이 좀 짧아요.”
글을 쓸 기회가 왔다!
바로 답장을 보내고 싶은 손가락을 고쳐 잡고 내일 아침에 내용을 자세히 보기로 한다. 한동안 손도 안 댄다고 다짐할 때는 언제고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비싼 참치 초밥을 가장 좋아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모둠으로 시킨 기본 세트에는 오도로가 딱 1피스 들어있다. 고소한 참치 뱃살이 올라간 초밥을 입에 쏙 넣으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우리 참치 초밥 한 세트 시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