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정모

흔한 외항사 승무원의 어느 완벽한 하루

by 밤 비행이 좋아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흰머리가 났었다. 한창 외모에 민감할 시기라 흰머리를 보고 충격받은 나에게 어른들은 새치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생기는 거라고 위로하셨다. 그 말씀이 맞았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새치 그림자도 발견 못한 걸 보면. 근데 바로 어제 프랑크푸르트에 랜딩 후 호텔에서 화장을 지우다가 흰머리를 발견했다. 처음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다가 수건 올이 풀려서 실이 붙은 줄 알고 털어내려고 했는데 유난히 끈질기게 붙어있어 자세히 보니 흰머리였다.


‘왜 이래 나 흰머리야’ 특유의 반짝임을 자랑하며 정수리 지점에 안착한 흰머리를 본 순간 패닉이었다.

‘요새 너무 피곤한가?’ ‘영양소가 부족한 식단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단백질 부족?’


가뜩이나 머리숱도 줄고 있어 고민이었는데 그 한 가닥 뽑아내는 게 어찌나 아깝던지… 아무래도 영양부족인 게 확실하니 이번에는 영양제를 한 무더기 사가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2019-06-04-14-39-20.jpg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자일 거리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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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유횩하는 길거리 음식





근 한 달 만에 다시 온 프랑크푸르트에서 때마침 운 좋게 흰머리를 발견해 영양제를 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행운인가! 무한 긍정 모드를 억지로 장착한 채 환전소로 향했다. 평소에는 환전을 안 하고 체크카드를 쓰는 편인데 자잘하게 길거리에서 군것질을 할 때면 환전을 한다. 젤라또, 시나몬롤, 길거리 와인 시음회 등 프랑크푸르트 길거리에는 나를 유혹하는 먹거리가 너무 많아 이 곳에 살면 한 달도 안돼 몸무게가 불어날게 틀림없다.

‘공항 모든 환전소는 2시에 문 열어’ 칼 같은 공항 환전소 덕분에 20분 정도 그 앞을 서성거렸다. 정말로 시곗바늘이 숫자 2를 가리키자마자 창구가 열렸다. 깐깐한 독일인 같으니라고! 융통성이 제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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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를 유로로 바꾸려고
그래, 근데 너 크루야?
어! 왜????
크루한테는 커미션 안 받아, 아이디카드 줄래?



크루냐고 물어보는 순간 촉이 딱 - 오길래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더니 친절한(깐깐한 독일인에서 급하게 태세 전환) 환전소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아뿔싸 아이디카드를 놓고 온 것이다. 친절한 그녀는 회사 이름과 사번만 적고 환전을 해줬다. 흰머리의 우울함을 날아가고 공짜 커미션의 기쁨만 남아 그 자리를 채웠다. 유일하게 아는 독일어 당케와 손하트를 남발하며 S반을 타고 중앙역으로 향하는 길에 이제 겨우 2번째 프랑크푸르트인 주제에 마치 제2의 고향에 온 것처럼 편하고 푸근하게 느껴져 사람 많은 S반에 낑겨서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프랑크푸르트 비행 삼 일 전부터 이상하게 포즈카페의(Pause café)의 시나몬롤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달달한 시나몬 롤은 물론이고 메뉴에는 없었지만 요청하자 즉석에서 만들어준 시원한 아이스커피와 길가의 테라스 벤치가 자꾸만 생각났다. 친구와 화기애애 이야기를 나누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그때의 분위기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그때의 따스했던 온도가 기억 속 시나몬 롤의 맛을 극대화시킨 게 분명하다.

왜냐, 근 6개월 간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고 기억하고 있거든.


그 시나몬 롤을 꼭 다시 먹어야 했다. 중앙역에서 자일 거리로 가는 길에 위치한 포즈카페는 여전히 달달한 향기를 풍기며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찾은 도시에 내가 좋아하는 가게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마치 나만의 단골집이 된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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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카페가 현지 맛집임에 분명한 게 근처에서 일하는 회사원들, 자전거를 타고 가던 독일인들이 끊임없이 카페를 드나들었다. 라떼와 시나몬롤을 테이크아웃해서 저번에 앉았던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아껴먹었다는 얘기다)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쫄깃하고 적당히 달달할 수가 있을까? 삼일전부터 계속 혀 끝에 느껴지던 바로 그 맛이었다.


저번보다 하늘은 더 높고 파랗고, 날씨는 좀 더워졌구나. 가만히 있어도 허벅지에 땀이 차오른다. 그래도 좋다.

라떼와 시나몬롤을 끝장내고서도 한참을 걱정 근심 없이 앉아 있었다. 다음날 비행이 풀로드라던가 도하에 랜딩 하자마자 바로 쿠웨이트 비행이 있다던가 이번 달 비행이 120시간이라던가. 오랜만에 잡생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그 평화로운 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던 엉덩이를 겨우 들어 DM으로 향했다. 건강을 챙기지 않고서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매 비행마다 절실히 깨닫고 있다. 홍삼정으로 부족한 게 틀림없으니 종류별로 영양제를 구비해 놓고 요일별 약통에 옮겨 담아야겠다고 결심했으나 어찌나 종류가 많던지 매장 한쪽이 각종 영양제로 채워져 있는데 브랜드별, 영양소별 하나하나 포장지를 뜯어보다가 그냥 Nr 1이라고 적힌 것들만 고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마그네슘만 해도 마그네슘 칼슘과 마그네슘 B12 가 있었는데 그 차이를 내가 어떻게 알까. 요즘 들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찾아보니 과로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는 비타민B를 복용해야 한다길래 그냥 비타민 B가 포함된 마그네슘을 골랐다. 이제 나도 서른이니 오메가3도 챙겨야 했고, 건조한 기내에서 렌즈를 끼고 있으니까 눈에 좋다는 영양제도 하나 챙기고, 심장에 좋다는 마그네슘 그리고 햇빛을 못 쬐니 대신 비타민D로 보충하기 위해 이것저것 골라 넣으니 바구니에 영양제 상자만 가득했다. 지갑은 가벼워졌지만 영양제를 샀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 겨울 김장을 끝낸 엄마의 마음 같은 걸까? 뭔가 벌써부터 건강해진 느낌이 드는 건 왜지?


4시 30분까지 중앙역 스타벅스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했는데 영양제에 마음을 뺏겨 서둘러야 했다. 완연한 여름으로 돌아선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날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더 예뻐진 듯했다.


“아름다운 도시에 사니, 이뻐지는 게 당연하지.
네가 정말 부럽다. 이 적당한 더위와 맑은 하늘 그리고 시나몬 롤을 마음만 먹으면 먹을 수 있다니”


놀랍게도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항공사에서 근무 중인 그녀의 친구가 때마침 프랑크푸르트를 여행 중이었고 그렇게 여자 셋, 아니 다른 항공사 승무원 셋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됐다. 승무원들은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냐고 종종 물어보는데 승무원도 똑같이 월급쟁이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며 고객들을 응대한다. 고로 똑같다. 승객 얘기, 동료 얘기, 회사 복지 얘기 등. 물론 같은 직종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고충 매번 다른 도시를 비행한다는 특이점이 있기에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금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 동안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와 고민들을 나누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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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현지인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우리를 양 옆에 대동하고 안내한 곳은 동네 학센 맛집으로 자자한 Klosterhof다. ‘자 그래서 맥주부터 시킬까?’ 학센 맛집에 와서 이구동성으로 맥주를 외친 우리는 천생연분인가 보다. 메뉴는 안중에도 없고 다양한 맥주 종류 사이에서 방황하던 우리는 결국 점원한테 추천받은 하우스 맥주 500ml로 통일했다. 결국 맨 위에 있는 대표 맥주를 고를 거였으면서 괜히 이것저것 찔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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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맥주 잘하네' 목넘김이 좋던 이곳의 하우스 맥주





슈니첼과 학센은 물론 샐러드까지 곁들인 풍성한 만찬을 함께했다. 한국 돈가스보다 훨씬 얇고 좀 더 단단한 독일식 돈가스 슈니첼과 독일식 족발인 학센은 이곳의 대표 메뉴다. 오랜만에 맛보는 돼지고기가 어찌나 맛있던지 배가 불러도 한동안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생각에 욕심을 좀 냈다. 사실 학센만큼 맛있는 게 사이드로 딸려오는 감자다. 전분가루를 뭉쳐서 삶은 투박한 감자요리가 함께 나오는데 정말로 쫄깃쫄깃하다. 우리나라의 감자떡 같은 식감이다. 학센 소스에 적셔 먹으면 감자 주제에 고기만큼 맛있다.


머리 위에 늘어진 나무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송진가루 같은 게 우수수 떨어졌다. 함께 먹는 사람이 좋고 음식은 맛있고 맥주는 알싸하고 바람은 시원하겠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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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강 다리와 전





7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살짝 피곤했지만 호텔로 돌아가기에 너무 아쉬운 날씨라 저번에 마인강을 못 봤던 게 아쉬웠던지라 천천히 마인강변 쪽으로 이동했다. 한 5분쯤 걸었을까?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 뒤로 햇빛에 반짝이는 마인강이 보였다. 한강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에서 처음 보는 강이었다. 강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주는 다리는 생각보다 아름다웠는데 한강다리만큼 길고 큰 건 아니었지만 주변의 고풍스러운 옛날 건물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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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강에서 뢰머광장 쪽으로 이동하는 데 사람들이 전부다 젤라또를 할짝거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우리도 그 움직임에 합류해야 했다. 배가 부른데 왜 자꾸 먹고 싶은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싱글은 아쉽고 트리플은 많으니까 더블로 하자. 중간으로 합의를 본 우리는 고소하고 달콤한 초콜릿 쿠키와 상콤한 스트로베리 젤라또를 할짝거리며 광장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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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머 광장




프랑크푸르트의 매력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현대적인 건물들 사이에 이렇게 아름다운 목조건물이 숨어있다. 특이한 디자인의 건물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위치한 고딕양식의 목조건물은 지난 500년간 시청사로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도시에 무슨일이 있을 때마다 광장에 모여 각종 교류의 장을 열었을 게 분명하다. 마치 오늘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학센 맛집에 모여 화합을 도모했이 말이다. 비록 반나절이었지만 다음번엔 다른 도시에서 만나 또다른 정모를 갖자고 약속했다.


광장을 벗어나 다시 중앙역으로 돌아올 때까지 프랑크푸르트의 하늘은 여전히 밝았다. 언제나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다니던 탓에 호텔로 향하는 발걸음이 영 께름칙했다. 뭔가를 놓친 기분. 모든 여행은 언제나 아쉬움이 남지만 어쩐지 프랑크푸르트에는 더 마음을 주게 된다. 그래서 떠나는 게 두 배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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