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끝없는 호기심, 자신의 치부까지 스스럼없이 내보이는 솔직함, 인간에 대한 겸허한 관심 등으로 언제나 나를 즐겁게 했다.
헨리는 깊은 관계를 동경했고, 내가 보기에 그는 정말 관계의 귀재였다.
진정한 관계와 가식적인 관계를 용케 구별하여 어떻게든 가식적인 관계를 치유하려 했고, 바로 그 일로 우리 모두를 아주 잘 섬겼다.
"나를 따르라."
기진맥진하여 마냥 따분하고 지겨워 보이던 삶에 방향이 생긴다.
길을 걷다가도 "이제야 내가 왜 사는지 알겠다!" 하고 감탄 어린 혼잣말이 나올 수도 있다.
주님은 나의 집이시다.
주님은 나의 은신처이시다.
주님은 나의 보호막이시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시다.
주님은 나의 장막이시다.
주님은 나의 성전이시다.
주님은 나의 거처시다.
주님은 나의 가정이시다.
주님은 내가 평생 살고 싶은 곳 그 자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도록 초대받았다.
지금 당장 그 친밀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도록 초대받았다.
영적 삶이란 우리가 하나님 가족의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초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듣기]
예수님을 가리켜 보이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진지하게 대하라.
설령 그 사람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말이다.
[묻기]
"주님, 주님이 누구신지 알려주십시오. 사람마다 주님에 대해 하는 말이 달라요. 제가 직접 주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싶습니다. " 두려워하지 말고 물으라.
[거하기]
삶이 바쁘다고 핑계대지 말라. 지금 당장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도 말하지 말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주님 곁에 거하는 것이다. 날마다 기도하며 그분을 발견하라.
그러면 이 적대적인 경쟁 사회에 살면서도 늘 집에 머무르는 안정감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논리에 얽매여 살아간다. 에수님은 논리를 깨뜨려 새로운 존재 양식을 열고자 하시건만 우리는 이를 두려워한다. 그러면 더 이상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우리 존재에 중심에 모시면 이제 앞날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말로표현하기 힘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라. 그러면 너희가 그토록 염려하는 다른 것은 다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왜 이렇게 염려하고 집착하고 두려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주겠다.
내 안에 생명이 있으니 너희 주인인 나를 따르라. 너희에게 생명을 주겠다.
항상 사랑을 선택하고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지 않는 것, 이 역시 작은 변화다.
초점이 있는 삶은 더 이상 피곤하지 않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분의 영과 빛과 마음 안에 살되 또한 나의 영과 빛과 마음으로 산다는 뜻이다.
관계의 지향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품으시는 더 큰 사랑이다.
결혼은 이러한 고백이다.
"우리가 맺어지는 이유는 서로가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로 부르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그 분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통로로 삼으신다.
두 사람이 하나 되어 가정을 이룸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환대할 수 있고
우리의 자녀와 친구가 될 수 있다.
결혼이라는 자리는 우리를 하나로 부르신 하나님을 더래니는 통로다."
원수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보지 못했을 때에 한해서만 원수로 존재한다.
미움과 배척과 질투와 원한의 감정은 우리가 만들어 낸 두려움의 감옥에 우리를 가둔다.
자신이 만들어 낸 원수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는 마음을 품고 더는 타인을 기준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다면,
그때마다 우리는 사랑의 집인 하나님의 집에 기에 들어가 머물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면 처음 사랑의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달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