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타일 큐레이터 Dec 15. 2017

세기의 아이콘: 재클린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 (3)

남편의 암살 이후 재키의 행보

*전편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1963년 11월 22일에 발생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은 당시 미국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줬다.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자동차 퍼레이드를 하던 중 발생했는데, 당시 옆좌석에 앉아있던 재키는 암살범의 총탄에 의해 남편의 두개골이 산산조각이 나는 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다.

그녀는 피로 범벅된 옷을 갈아입지 않았고 케네디의 시신 곁을 지켰는데,

사고 당시 그녀가 입고 있었던 피로 물든 샤넬의 핑크 트위드 수트는 미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의상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케네디 사망선고 후 90분만에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린든 존슨 부통령. 훗날 재키는 남편의 암살 배후자로 그를 지목한다.

그리고 이틀 뒤 암살 용의자인 리 하비 오스왈드마저 암살되면서 케네디 암살사건의 배후는 미궁에 빠져들게 된다. 이때 케네디의 장례식이 거행되는데 각종 음모론이 들끓고 혼란에 쌓인 가운데 재키는 두 아이의 꼭 손을 잡고 남편의 운구를 따라 걸었다. 이는 차를 타고 따라가던 관례를 깬 행보인데 총알이 언제든 날아올 수 있는 상황에서 운구 행렬을 따라 걸으면서 재키가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상복을 입은 재키와 아버지의 운구를 향해 경례하는 케네디 주니어

그날은 아들 존의 3번째 생일이기도 했는데 그녀는 예정돼 있던 존의 생일파티까지 마친다.

그리고 이후 신비주의를 고수하던 그녀 답지 않게 여러 작가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며 남편의 업적과 추억을 기록하는 일에 온 힘을 쏟는다. 케네디 예술센터, 도서관 등도 신속하게 건립한다.


이때가 재키의 인생 중 가장 힘든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전부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정성을 다해 복원한 백악관은 한순간에 남의 집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아직 어린 두 자녀가 있었다.

그녀는 뉴욕 아파트에 틀어박혀 몇 달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홀로 슬픔을 곱씹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진해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그녀는 언론 매체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녀는 평생 동안 질긴 파파라치들에게 시달린다). 아이들과 조용히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이들 가족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매스컴과 대중들의 관심.  


당시 혼란스러웠던 미국에 다시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존 케네디의 동생 바비(로버트) 케네디. 그는 형의 왕좌를 이어받고자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다.

바비 케네디는 홀로 남겨진 형수 재키와 두 조카를 성심성의껏 돌봐줬고 예전부터 재키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 둘은 케네디가 떠난 후 서로에게 깊이 의지하고 바비가 지나치게 재키를 챙겨서 아내 에델의 질투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비 케네디마저 암살을 당하는데...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은 재키는 케네디 일가가 모두 암살범의 표적이 아닌가 싶어 아이들의 안위에 공포를 느낀다.   


그녀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증오하기 시작했고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오나시스는 얼마 안 있어 그녀에게 비행기, 그리스의 섬, 300피트짜리 요트를 선물하며 청혼하고 둘은 결혼을 발표한다. 그녀의 결정은 세계적으로 이슈를 일으키며 환영받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한 때 자랑스러운 영부인이었던 재키가 나이도 그녀보다 23살이나 연상에 키도 작고 과거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던 그리스 억만장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녀를 존경하던 많은 팬들이 떠나가고 주변 사람들도 등을 돌린다.


하지만 재키는 그 시점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마음의 위안과 안식처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자식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1968년 결혼식을 감행한다. 오나시스는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로 그가 해운업으로 모은 재산은 당시 기준으로 3억 달러 (오늘날로 따지면 15억 달러), 그때 당시 세계 최고의 부호였으며 케네디처럼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이었다.


조용히 전남편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에 신경 쓰며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게 도리에 맞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남편과 사별 후 평생 혼자 지내며 아이들만 바라보고 사는 건 힘든 일이죠. 사람들은 왜 자신들도 하길 꺼리는 일들을 저에게 강요하는 거죠?"라고 대답한다.

남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아가는 당시 보기 힘들었던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결혼 후 둘은 오나시스가 재키에게 선물한 그리스 스콜피오스 섬에서 보금자리를 틀었다.

재키의 바람처럼 오나시스는 재키와 그녀의 아이들을 경제적인 면과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이때가 재클린 패션의 두 번째 시기, 스콜피오스 시절.

재키 오(Onassis의 약자)라는 별명이 이때부터 생겼다. 그녀는 마침내 영부인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났고 이는 스타일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지중해 라이프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한결 드라마틱하고 자유로운 패션을 자랑했다. 억만장자와 결혼하면서 금전적으로도 여유로워진 그녀는 다시 유럽 명품 브랜드의 옷에 열광하기 시작하며 원 없이 쇼핑한다. 이 시기의 의상들은 심플하면서도 사치스러운 패션.

여자들은 재키가 매장을 들어섰다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가서 직원들에게 방금 재키가 산 옷들을 모두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가죽 샌들이나 쪼리를 신는 등 영부인 시절보다 자유분방한 이미지인 동시에 세련된 이미지와 편안함을 동시에 잡은 화이트 진을 자주 착용한다.

사치와 여유를 바탕으로 한 재키 오 스타일은 젯셋족 (호화로운 제트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최상류 층) 스타일을 대표하는데 당시 파파라치 사진을 보면 늘 요트나 해변 위에서 여유를 즐기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모습이다. 젯셋족 스타일은 대중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며 70년대 패션에 큰 영향을 주고 휴가를 즐기는 재키의 모습은 이후로도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리조트 컬렉션의 영감을 준다.


오나시스와 결혼했을 때 그녀는 30대 후반이었지만 학구열은 여전했는데,

그리스의 문화에 흠뻑 빠져든 그녀는 그리스어와 그리스의 역사 및 문학을 공부했으며, 전통춤인 시르타키와 그리스의 고고학까지 정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나시스와의 결혼생활은 시간이 가면서 행복하지만은 않았고 그는 재키를 아내보단 전리품 정도로 취급하며 공개석상에서도 여러 번 망신을 줬다고 한다.

그는 1975년 사망하는데 그때 이미 둘은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다.


또다시 미망인이 된 재키.

아이들도 다 성장했고 자신을 위한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던 그녀는 새로운 다짐을 한다.

재키는 직장을 다니기로 결정함으로써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학생 때부터 지독한 독서광이었으며 글쓰기를 즐겼던 그녀는 이 평생의 취미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기로 한다. 그녀는 뉴욕으로 돌아와 출판계의 문을 두드리며 커리어 우먼의 생활을 시작한다.


영부인으로 그리고 억만장자의 부인으로 화려한 시절을 누린 이후 출판사 취직이라는 그녀의 행보는 의아할 수도 있다. 오나시스가 남긴 거액의 유산으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50위 안에 들 정도였으니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남편들의 그늘에 갇혀있지 않고 자신만의 로드맵을 개척하고 싶어했으며 가치 있고 유익한 책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녀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재키는 편집자 일을 시작하며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보람을 느낀다.

그녀만큼이나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아이디어에 둘러싸여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 지식과 견문을 쌓으며 진정으로 충만해진 삶을 경험한다.

그녀는 실제로 사무실에 출근해서 다른 직원들처럼 직접 커피를 타고 열정적으로 일했다.

출판계는 재키의 재능과 경험, 인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분야였다.

백악관 안내책자 작업을 한 경험으로 이미 텍스트를 편집하고 레이아웃을 배치하는 등의 편집 절차에 능했고 전 세계 누구든 그녀의 이름을 대면 섭외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바이킹 프레스사의 편집장을 거쳐 더블데이사의 부편집장에 오르는데 모두 미국 최고의 출판사.

금세 동료와 저자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고, 70여 종의 책을 출간한 그녀의 활약은 성공적이었다.


“현실 도피를 위해 읽는 것도 좋고, 모험담을 읽는 것도 좋고, 로맨스를 읽는 것도 좋지만,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깜짝 놀라겠지만, 걸작이 2류 작품들보다 훨씬 읽기 쉽고 재밌어요. 당신의 상상력과 가슴 깊숙이 숨어 있는 동경심을 자극하기 때문이죠. 상상력이 일단 잠에서 깨어나면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거든요.”


이때가 그녀의 인생의 세 번째 시기, 편집자 시절.

그녀는 예전의 사치스러운 면을 벗어던지고 실용적이면서도 도시적인 커리어 우먼 스타일로 변신한다.

차분한 색상의 실크 블라우스와 청바지, 트렌치코트를 입고 뉴욕의 거리를 거닐었으며 이전 시절보다 이때가 더 활기차고 어려 보인다.

절친이었던 마이클 잭슨과

모리스 템펄스먼과 가까워진 것도 이때.

금융업자인 그는 재키의 재정을 관리해주었으며 1억 달러가 넘는 오나시스의 유산을 네 배로 불려주었다. 재테크 이외의 생활도 세심하게 챙겨줬고 곧 동거를 시작한다.

그는 과거에 재키의 남자들과 달랐다.

케네디처럼 잘생기지도, 오나시스처럼 어마어마한 부호도 아니었지만,

그 대신 자상하고 똑똑했으며 재키처럼 배움을 가치 있게 생각했다.

특히 그는 두 전남편들과 달리 일이나 다른 여자들보다도 일편단심으로 그녀를 가장 우선시했고 그녀를 위해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이 둘은 함께 휴가를 떠나고 책을 읽고 자식들과 시간을 보내는 등 알콩달콩한 생활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분야의 커리어를 열정적으로 쌓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남자와 함께한 이때가 재키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나 직업적인 측면에서나.


그리고 재키는 암 진단을 받는다.

항암치료를 시작했을 때 템펄스먼은 그녀의 곁을 계속 지키면서 병원에 함께 가고 날마다 그녀가 좋아하는 꽃을 사주었다. 재키 또한 생존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와중에도 낙천적인 모습을 유지하면서 사무실에 출근하며 열심히 생활한다. 가발을 쓰고 다니고 체력도 급격히 떨어졌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조만간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며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꿋꿋하게 암세포와 싸웠고 병을 이겨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밝혀지자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1994년, 가족들에 둘러싸인 그녀는 눈을 감았고 템펄스먼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마릴린과 재키를 글 주제로 삼은 것은 그녀들이 반 세기도 훨씬 이전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여성만큼이나 진취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릴린은 성을 터부시 하던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를 당당하게 조롱했고,

재키는 사회가 시킨 쪽이 아닌 자신이 원하던 인생을 개척해나갔던 시대를 앞서 나간 여성이었다.


재키의 엄청난 매력은 대부분 후천적 노력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그녀를 단순히 세계에서 옷을 가장 잘 입는 여성, 혹은 두 남편의 후광을 등에 업은 여자라고만 평가하기에는 아쉬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녀의 현명한 통찰력 뒤에는 방대한 독서량이 있었고 (일주일에 8-10권 정도 읽었다고 한다), 날씬한 몸매의 뒤에는 평생 꾸준히 실천한 운동과 다이어트가 있었고, 탁월한 패션감각과 안목 또한 집요한 노력의 결과였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 들었던 그녀는 매 순간을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늘상 강조했지만, 남편 케네디가 몸담은 정치와 외교 세계에 대해 더 알기 위해 조지타운 대학교의 대학생이 되어 외무와 국제관계 수업을 들었다. 두 번째 남편을 따라 그리스로 이사 갔을 때는 그리스 문화에 푹 빠져 지내 오나시스가 "재키는 늘 책만 읽는다"라고 불평할 정도. 뉴욕으로 돌아와 편집자로 활약했을 때 또한 직업을 이용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흥미진진한 경험과 지식을 축적했다. 영부인 시절 외국의 수많은 고관들이 재키의 매력에 빠졌을 때 그들이 진심으로 감탄한 것은 그녀의 외국어 실력과 국제 정세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었다.


또한 재키는 평생 44 사이즈의 몸매를 유지했는데,

인도 네루 수상에게 소개받은 요가를 매주 하며 유연성을 유지했고 조금이라도 많이 먹었다 싶으면 다음 날은 물과 과일만 먹는 등 날씬한 몸매를 위한 그녀의 자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평생 소식을 실천했고 샐러리와 당근이 그녀가 즐겨 먹었던 간식.


또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외적 콤플렉스를 솔직하게 인지하고 단점들을 고쳐나간다.

패션 잡지를 꼼꼼히 연구하고 헤어와 뷰티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는 뷰티데이로 정해서 목욕을 하고 눈썹을 다듬는 등 외모에 신경 썼다고 한다.

다음은 그녀가 한 말이다.

"분별 있는 식사와 적당한 수면을 취하고, 진정 노력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청결함과 단정 함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매주 약간의 시간을 투자한다면 최고의 남자가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해도 쓸데없이 당황하거나 장황하게 준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노력들로 인해 완성된 그녀만의 개성은 그녀를 얼굴만 예쁜 여자들과는 차별화된 존재로 만들었고 남성들도 이런 부분에 엄청난 호감을 보였다.


자신의 남자들에게도 맞춤형 선물을 즐겨했는데 예를 들면,

그녀가 영국 여왕의 대관식을 취재하러 갔을 때 무거운 짐가방에 케네디가 좋아할 만한 희귀한 고서들로 가득 채워서 미국으로 돌아온다. 이 때문에 추가 요금을 100불 정도 지불했는데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금액. 또한 오나시스는 던칸 하인스라는 브랜드의 초콜릿 케이크를 좋아했는데 재키는 늘 뉴욕에서 돌아올 때 그를 위해서 이 케이크를 몇 박스씩 챙겨 왔다고 한다. 그런 디테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남성들에게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신비주의도 재키의 매력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개인적인 감정이나 아픔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함께 시간을 보낼 상대를 까다롭게 골랐으며 사생활을 사수하는 태도는 그녀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녀는 평생 대중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는데 생전 동안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나중에 그녀에게 자서전을 집필하는 게 어떻냐고 제안해도 ‘나는 인생을 즐기고 싶을 뿐, 그걸 기록할 생각은 없다’며 거절한다. 요즘 sns를 통해 모든 일상을 필요 이상으로 공개하는 셀러브리티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옷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에도 스타일을 입혔다. 누구를 만나도 품위 있게 대했으며, 상대방의 이야기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얘기인 것처럼 경청했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상대와 대화를 나눌 때도 주눅 들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해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감사의 편지는 24시간 안에 보낸다는 원칙 아래 진심이 담긴 손편지를 즐겨 보냈다. 상대방의 지위나 중요도에 상관없이 그녀는 언제나 예의 바르게 감사의 편지를 썼고 그녀에게 편지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편지를 지금까지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재키처럼 생긴 사람도, 재키처럼 말하는 사람도, 또 재키처럼 기발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존 F 케네디의 동생 테드 케네디가 재키의 장례식에서 낭독한 이 추도사는 그녀의 자아상을 제대로 요약했다. 그녀가 남들보다 꽉 찬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던 덕분.


재키는 살면서 수많은 사건들을 겪었으며 때때로 좌절도 경험했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았으며 특히 남편이 암살당한 뒤에는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만, 마지막까지 인생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묵묵히 이겨냈고 전보다 더욱 강해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마릴린은 신비주의에 매사에 조심스러운 재키에 반해,

기분 좋을 땐 실컷 웃고 슬플 땐 펑펑 우는 등 그때그때 감정을 여과 없이 흠뻑 분출하고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는데 이런 아이스러운 천진함과 고집스러움, 풍부한 감수성은 그녀를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데 한몫을 했고 그녀가 스타가 될 수 있었던 많은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재키가 좀 더 공공장소에서 예의와 교양을 지키는 훈련이 어릴 때부터 되어있다면 마릴린은 무슨 일이 있던 자유분방하고 가벼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솔직한 그녀는 할리우드 속성을 혐오했는데. 이런 말을 남긴다.


"할리우드에서는 여성의 순결이 머리 스타일만큼도 종요하지 않다. 오로지 외모로 평가될 뿐, 인격은 중요하지 않다. 키스 한 번 하기 위해 1000달러를 지급하고 영혼을 사기 위해서는 50센트를 지급하는 곳이 할리우드다. 나는 첫 번째 제안은 수없이 거절하고, 영혼을 위한 50센트를 끝까지 요구했기에 그것을 잘 안다."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내가 마치 사람이 아니라 거울인 것처럼. 그들은 나를 본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나더러 음란하다며 자신들은 점잖은 척 하얀 가면을 썼다."


지성미를 갈망했던 그녀는 세 번째 결혼을 미국을 대표하는 극작가인 아서 밀러와 한다.

그는 마릴린과 이혼한 후 그녀를 이렇게 평가했는데,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실제 성격보다 더 냉소적이고, 현실성과도 동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옷을 끌어당기는 군중에게 시를 읽어주려고 애쓰는 거리의 시인이었다.


비극적인 짧은 생 때문일까.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은 사망 후 더욱 급속도로 세계로 뻗어나갔고 겉만 화려한 할리우드의 불행한 삶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비극적인 여배우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됐다.


재키가 좀 더 태생적으로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마릴린보다 오래 살았지만 유명함에 있어서는 마릴린이 더 앞선다. 마릴린이 오늘날 더 사랑받고 추앙받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순수했던 영혼에 좀 더 공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알려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그녀의 순수한 섹슈얼리티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그렇지만 함부로 드러내기 꺼려하는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그녀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삶에 대한 불안함, 혼란스러움, 나약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용기에 기꺼이 박수를 보낸 것이다.


금발과 풍만한 몸매, 관능미와 사랑스러움이 공존하는 그녀의 스타일은 미에 대한 새로운 기준점을 만들어냈고 팝 컬처의 아이콘으로서 그녀가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그녀를 대표하는 수식어만 해도 섹스 심벌, 패션 아이콘, 할리우드 전성기를 대표하는 배우, 팝 아이콘..

 
그러나 그녀도 평범한 삶을 갈망했는데,

"마릴린 먼로여서 좋은 게 뭐가 있담? 왜 나는 보통 여자가 될 수 없는 거지? 가정을 가질 수 있는 한 여자… 나도 한 아이, 내가 낳은 아이에 만족하고 싶다."


겉으로는 위풍당당한 마릴린이 사실은 외유내강형 재키보다 더 연약한 여성이었고 엄청난 매력으로 대중들에게 평생 사랑받았지만 결국 그럼에도 안정적인 사랑을 갈망한 평범한 여성 같아서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이 두 여성의 인생에는 영광스러운 나날들 만큼이나 시련도 그림자처럼 함께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이 둘은 인생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삶이 허락하는 한 기꺼이 생명력을 내뿜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원하는 길을 따라 열정적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주도하는 인생...

그들의 업적, 함께했던 남자들, 유명세를 떠올리기 전에 우리는 이것을 먼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재키처럼 완벽한 외모와 체형을 가지지 않아도,

마릴린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의 아픔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앞으로의 운명과 비전을 결정하게 하지 말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참고 문헌>

'워너비 재키', 티나 산티 플래허티

'아이콘의 탄생', 강민지

'Are you a Jackie, or a Marilyn?', Pamela Keogh

매거진의 이전글 세기의 아이콘: 재클린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