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내 인도 이야기
나의 인도방문기는 두번으로 나뉘어진다. 한번은 산업인력공단을 통해 인도기업인 SATYAM 으로의 해외취업으로 나가 코트라 취업으로 이어진 첫 번째 약 3~4년의 기간이었고, 두 번째는 그 이후 한국에 들어와 취업이 된 이후 주재원으로 나갔던 두번째기 약 3~4년이다.
세상 차가운 엄마와 다툼이 많던 불안정한 가정에서 마음고생은 했으나, 아버지가 중소기업체를 운영하셨었기에 나름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서 몸이 고생하진 않았던 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인도로 취업을 하게 돼서 나올 때 즈음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가 나서, 그나마 돈으로 이어져 있던 가족이라는 끈이 떨어져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빚쟁이들이 집으로 찾아오면서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넓은 집은 공포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정리되지 않는 불안한 상황이 이어지던 즈음 나는 인도로 취업이 되어 나와야 했고,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친할머니가 있는 동네로 쫓기듯 이사를 가야 했다.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인도로 갈 당시 내 수중에는 반토막이난 보험해약금과 가기 전 아빠가 나를 몰래 만나 주었던 960달러가 전부였다.
인도에서 처음 배정된 셰어하우스에는 나 이외에도 함께 온 한국 친구들 세 명과 브라질 친구 캐나다친구가 있었고, 그 앞집에도 역시 같은 경로로 온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살고 있었다.
화장실이 한 칸씩 딸려있는 방세개에 부엌이 하나였고, 방한개당 두 명이 생활할 수 있도록 배정이 되었다. 처음 그 집에 가서 내가 든 생각은 '아 사람이 더러워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였다.
여러 사람이 써야 하지만, 관리가 잘 되지 않고 널브러져 있던 더러운 식기들과 빈대가 나올법한 침구류가 내 현실이었다. 이미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구덩이가 나를 잡아끄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상상한 해외 취업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에어컨이 없이 40도가 넘는 방에서 고열을 버티며 열병도 앓고 물갈이도 했다. 물론 나만한 건 아니었고, 함께 온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한 친구는 여기저기 겁 없이 쏘다니다 미친개에게 물려 병원까지 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젊었고, 무언가 희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중 아직도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는 캐나다에서 온 Arnab라는 친구는 그 당시 치열했던 인도에서 나름 의지가 되었던 친구이기도 했다. 이 친구는 부모님은 인도분이고 캐나다에 이민을 가서 살고 있는 2세였다. 생김새는 완벽한 인도인이지만 캐나다인이었던 아르나부는(그를 부르던 애칭) 말이 매우 빠르고 특이한 억양을 가지고 있는 친구여서 처음 말을 알아듣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20살 초반이었던 아르나부는 저녁이 되면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20살 초반에 부모의 나라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 그를 보면 안쓰러운 맘이 들어 곁에 가서 말을 걸곤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 자신에 대한 안쓰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르나부우~ 뭐 해? 고향생각해? "
라고 물어보면, 늘 감성 어린 그의 행보(?_)와는 다르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그였다. 알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교수에, 대단히 똑똑하고 세상 부유한 데다 유머러스한 친구였다. 지금도 그의 인스타는 온 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사진으로 가득하다.
같이 온 다른 한국 친구들은 IT 쪽이어서 발령이라는 것이 나보다는 빨리 나서 3개월 정도 지나자 일을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나는 마케팅 쪽이어서 발령이 나는데 매우 오래 걸렸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버텨야 하는 무기력한 시간이 이어졌다.
얼른 경력을 쌓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마음은 급했지만, 인생이 원래 맘처럼 되진 않았지만, 인도에서는 더더욱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속도대로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돌아갈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