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쉬키쉬 아파트의 남자셋 여자셋

그냥 내 인도이야기

by 영어하는 소시지

사는 곳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Satyam에서 해외 인턴들을 관리하던 인도인 리쉬에게서 연락이 왔다.

“살만한 곳을 구했어요.”


그는 나를 ‘리쉬키쉬 아파트’로 안내했다. 그렇게 나의 리쉬키쉬 생활이 시작됐다.

그곳에는 남자 셋, 여자 셋이 살고 있었다. 마침 한 명이 고국으로 돌아가며 자리가 났고, 나는 운 좋게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노르웨이에서 온 호킨,
브라질에서 온 안드레아스,
프랑스에서 온 프란시스와 그의 연인 아나,
그리고 지금도 고마움을 잊을 수 없는 J 양.


한국이 지금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거리에 나가면 누구나 물었다.
“노스 코리아? 사우스 코리아?”
하지만 J가 쌓아온 좋은 인상이 있었던 덕분에, 나 역시 따뜻한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J는 나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는 동생이었지만, 단단한 친구였다. 담담했고, 자기 확신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조용한 강단이 있었다. 내가 가장 많이 기댄 사람도 그녀였다.

같은 언어로, 같은 정서로 하루를 털어놓을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였다.


호킨은 키가 190이 넘었다.

키가 크고 마음이 넓은, 플랫의 ‘아빠 같은’ 존재였다.
안드레아스는 작고 유쾌했다.
남미 특유의 유머로 집 안을 늘 웃음으로 채웠다.
프란시스는 아프리카 출신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자라 거대한 체구에 세련된 말투를 지닌,
마치 ‘전사 같은 신사’였다.
아나는 모델처럼 아름다웠고, 마음은 더 아름다웠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인도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리쉬키쉬 플랫은 외국인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아 들어오기가 쉽지 않은 ‘명소’ 같은 곳이었다고 했다. 그곳에서 나는 오랜만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주중에는 회사에 나갔고, 통역 아르바이트가 있을 때면 그 일도 병행했다.

저녁이면 친구들과 요리를 해 나누어 먹었고, 주말엔 짜파티 집에서 외식도 했다.

가끔은 작은 하우스 파티를 열어 다른 플랫의 친구들도 불러 함께 웃었다. 긴 연휴에는 함께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간혹 단수나 정전이 있었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물이 끊기면 샤워를 미루면 됐고,

불이 나가면 촛불을 켜면 됐다.





그러나 열병만큼은 달랐다.

어느 날, 남미에서 온 친구가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고열과 탈수로 고생하다 입원까지 했고, 결국 세 번째 재발 끝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집 근처엔 하천과 빈민가가 있었다고 했다.


안타까움도 잠시,
그렇게 첸나이에 익숙해져 갈 무렵, 나에게도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J의 계약기간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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