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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인 Nov 30. 2016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용기

알랭드보통의 '사랑의 기초'


알랭은 사랑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글솜씨를 자랑한다. 사랑이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알랭의 책은 너무나도 불편하다. 알랭은 사랑을 쪼개고 쪼개서 보고싶지 않은 부분까지 여실히 드러낸다. 알랭의 책을 읽고 나서 사랑에 대한 환멸감이 들지 않았다면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랭의 책은 선풍적 인기를 끈다. 사랑이라는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 책을 우리는 왜 자꾸 보게 되는가.


힘들었던 과거도 지나고나면 미화되듯이 멀리서 보면 많은 것들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위용을 뽐내고, 이에대한 여러 의문과 모순을 잠식시킨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피할 수 없는 아주 추악하고 모순 가득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알랭은 말한다, 사랑이 그렇다고. 사랑은 누구나 쉽게 갈망하지만, 쉬운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외적갈등과 내적갈등을 사랑을 하는 누구나 느낀다. 그 과정 속에서 타인을 배우고, 자신을 배우고, 관계를 배운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이유는 간단하다.

보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알랭의 책을 읽는다.


하지만 알랭의 책 속에서 절망감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위해 고민하는 이성이 개입하는 순간 첫번째 모순이 생겨난다. 사랑이란 존재자체가 부정당한다. 사랑은 순수하고 이성의 개입을 최소화해야한다는 존재의 당위를 극복하고 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결국 사랑은 이성에 의해 파괴당한다. 이때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려워진다. 사랑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그것'마저도 제대로 안되기는 매한가지다.


사랑의 무덤은 결혼이라는 말이 있다. 결혼은 사랑과는 다르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결혼이라는 것이 사랑의 모순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사랑도 잘하고 싶고 결혼도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행복을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면에서 결혼에 대한 분해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위험한 질문이다. 결혼에 당위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알랭의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나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의 욕구를 모두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일부일처제의 제도는 모순 투성이다. 불륜과 외도는 악당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일부일처제를 무너뜨리자니 상대에 대한 신뢰를 통한 심리적 안정감과 육아가 위태로워진다. 딜레마에 빠진다. 안할 수도 없고, 마냥 할 수도 없다. 나는 다음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1. 결혼을 하지 않으며 독점적 연애에서 벗어나 비독점적 다자연애자가 된다.

누구도 구속하지 않고, 동시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다. 서로 원하는 것이 일치할 경우 만나고 그렇지 않을 경우 헤어진다. 솟아오르는 욕구를 참아낼 필요가 없다. 억압은 사라진다. 대신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


2. 독점적 연애를 지속하여 결혼을 하고 그곳에서 솟아나는 모순적 감정을 모두 억압한다.

상대방을 구속하면서 동시에 구속당한다. 서로 원하는 것의 일치에 구애받지 않고 절대적인 안정감을 서로에게 제공한다. 미칠듯한 권태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방을 통해 해소하고, 여러 일과 취미를 통해 견뎌낸다.


3. 독점적 연애와 결혼을 지지하고 이것의 장점을 취함과 동시에 이것으로 인해 억압되는 충동과 욕구는 상대방 모르게 해소한다. 즉 1번과 2번의 장점만을 어떻게든 취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나에게 허용된 자유와 상대방에게 허용된 자유가 동등하기를 바라지 않는 본성이다. 이것은 나와 상대방이 영원히 합일할 수 없고 분리된 두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자기 자신에게 착한 사람과 타인에게 착한 사람 사이에는 봉합될 수 없는 균열이 있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요구의 결집은 거대한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문명의 도덕성은 다시 문명을 건설한 모든 개인에게 강요된다. 사회는 억압하려는 자와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자의 각축장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사랑은 억압하려는 자의 승리로 끝난듯 보인다. 그렇지만 미약하게나마 개인에게는 자유가 남아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판에 직면하여 인민재판에 회부되고 사회적 매장을 당하게 될지언정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자유는 주어져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어떤 길이든 가혹한 길이다. 한가지 위안을 삼아도 좋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이러한 가혹한 길은 누구도 피할수 없다는 점이다. 사랑은 천사들의 합창이 아니라 살려달라는 절규이다. 그럼 안되는가? 인간은 완벽하고 완전하지 않다. 완전무결한 신이 되려는 열망은 하루빨리 내려놓는 것이 좋다.


자신의 의복을 수치스럽게 여길 필요는 없다. 

여태까지 하던대로 자신만의 답을 찾고 그것을 옳다고 부르짖으며 발버둥치며 자신을 기만하면 된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보잘 것 없음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위단한 일이다.


"이렇게 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특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관심한 사람을, 미지의 운명 혹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힘겨움을. 그리고 직시하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연인들의 첫 번째 기대가 실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은 최대의 시련과 맞닥뜨린다는 사실을."(알랭드보통_사랑의기초 中)


"우리를 둘러싼 현대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험천만한 기대를 주입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실망하지도 않고, 우리 또한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묘기는 경우에 따라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알랭드보통_사랑의기초 中)


“맹세합니다. 당신에게, 오직 당신에게만 실망할 것을 맹세합니다. 내 후회의 유일한 대상이 ‘당신’일 것을 맹세합니다. 당신만 아니었더라면 평생 수없이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후회의 본보기일 것을 맹세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불행들을 탐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한 몸 바쳐 희생하기로 선택한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알랭드보통_사랑의기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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