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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Nov 30. 2016

지루한건 안하는게 좋지만 어쨌든 그걸 해내는건 비범하지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변용된 상태에서 나는 이별했다. 4년은 오랜 시간이었다. 이 책을 찾은 것은 굳이 해답을 얻기 위함은 아니었으며, 지나간 관계를 회상함에 있어 공정한 태도를 가져보고자(말도 안 되는 것은 안다) 하는 의도에서였다. 아니면 그냥 연애 소설에서 주는 시시한 설렘과 그로 인해 찾아오는 환멸과 허무를 얻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책 얘기만 하고자 한다. 내 얘기 섞지 않아도 충분히 이 소설 그 자체로 흥미롭기도 하고, 굳이 하고 싶지가 않기도 하다. 필요 없는 말이 길었는데 어쨌든 책을 읽어보았다.


소설의 풍은 흔히 알랭 드 보통의 유명한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처럼 화자이자 작가인 주인공이 관조적인 태도로 사랑에 관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구석구석 파헤친다. 그 시점의 거리감이 미적인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건강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질문지로써 이 소설은 충분한 문학적 가치가 있다.


책으로 들어가 보자. 책의 본문으로 들어가는 첫 장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떠난 휴양지에서 만나게 되는 어린 소녀. 그 신비함, 가질 수 없음, 모든 더러움에 무고한 순수성. 라캉이 남자의 사랑이 상대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환상에 대한 사랑에 가깝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그러하다. 과연 어떤 여자가 어린 시절 잠깐 스쳤던 완전하고 순결한 세상 속의 눈빛을 이길 수 있을까. 온전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 환상이 환상에 지나지 않고 이 무의식의 무언가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인정하며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거듭 자신을 다잡을 것이다.(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하지만 이 사고를 방해하는 유령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낭만'이다.


낭만이라는 말은 단어의 모양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음성적 구성도 아주 낭만스럽다. 사랑이 낭만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특별히 모욕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균열은 금세 일어난다. 낭만은 언젠간 끝이 난다는 점 때문에 매력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랑과 다르다. 우리가 아는 사랑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아주 강한 힘이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강한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나보낸 사람은 이 질문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낭만이 끝난 후 남는 것은 사랑일까 무엇일까.


소설에서 낭만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호감을 가지고 사랑에 빠지고 서로의 소외된 모습에 연민을 느끼고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다.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적절해 보였다. 두 사람은 어쨌든 서로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서로 아는 지성인이었고, 결혼을 하면서 모든 것이 완전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회의주의는 낯선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외롭고 괴롭다.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힘들고 어렵다.


소설에서 내내 그들의 머리 위에 거대하게 늘어선 장막은 한마디로 근대적 낭만주의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그게 낭만을 다룰 때에는 아주 빛깔이 아름답고 벨벳 커튼처럼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처럼 낭만적 연애 그 '이후'의 삶에서는 다르다. 이제 이 커튼은 무겁고 칙칙하고 따사로운 햇빛을 가리기만 한다. 자꾸 빙빙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이 커튼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나쁜 점도 좋은 점도 온전히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때로 아주 강한 몸짓으로 순결한 섹스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 등등등....


참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낭만을 삶으로 이어가 시도해보려는 강박은 도리어 주인공들을 지치게 한다. 사실 우리는 위의 모든 것들을 지킬 도리가 없다. 노력은 하지만 어쨌든 시도는 좌절되고 그것으로 인해 낭만 이후의 사랑은 위태로워진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 사랑이란 서로가 가진 결벽, 미성숙함, 괴벽 등을 이겨내고 그것들조차 인정하는 성숙하고 고결한 인간성의 도약.


그런데 사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참아주기도 어렵다. 하루에 스스로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기도 수차례. 그런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홍상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주인공 경수는 방석집에서 추잡하게 노는 성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 여기에 답하는 성우의 말이 아주 걸작이다. "사람한테 사람 이상의 것 요구하지 말아줄래?"


나는 이 책을 한마디로 갈음하면 바로 "사람한테 사람 이상의 것 요구하지 말아줄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근데 이렇게 말하면 대체 사랑은 뭔가. 사랑의 완성이라는 결혼이란 건 뭘까. 여기에 알랭 드 보통은 아주 거칠게 뺨을 치듯 말한다. 근대 이전까지 결혼은 사실 가문 보존, 재산 증식, 노동력 충원을 위해서 이루어졌다고. 명문화된 사회 정책 중 가장 오래되고 공고한 지위를 가진 결혼은 요즘 사람들에게도 어쩌면(심한 비약과 서투른 일반화를 해서 말하자면) 그냥 서류 한 장, 신도시 아파트 분양 1순위 청약 증서 한 장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낭만이 곁들여지면서 우리에게는 다른 종류의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다. 서로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진실되고 등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들. 그것 자체로는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나. 문제는 그로 인해 서로에게 자신을 자신이 아닌 존재로 꾸미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거대한 상실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더욱 외롭다.


이 외로움을 소설에서는 '외도' 편을 통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말 서로를 사랑하지만 낯선 상대에게서 자신을 찾는 사람들. 아내와 하지 못한 거칠고 음탕한 상상을 다른 이와 꿈꾸는 주인공. 섹스가 전부는 아니지만 섹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문제는 낭만이자 사랑이자 신성한 서약의 대상인 배우자와 하기에 섹스란 행위는 너무 천박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있다. 우리는 인간이 행하기에는 과도한 도덕적 이상을 사랑에 불어넣었다. 그래서 한 아이의 다정한 아버지이자 집안의 재정을 담당하는 회계사인 남편, 집 앞 잔디를 성실히 깎는 동거인인 남편을 묶어 놓고 섹스를 하는 이야기는 도저히 낭만 서사에 등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이 '낭만'의 지위 하에 있었던 시절에는 매혹적이고 귀여운 이야기였는데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렇게 외롭게 스스로를 버려둔 채 역할극을 하며 살아야 할까. 보통이 집도하는 사랑에 대한 해체 작업 속에서 맥이 빠지고 허무해 좌절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의 격언을 빌려 말했듯 회의주의자는 가장 엄격한 이상주의라고 했던가. 보통은 친절한 사람이다. 답은 간단하다. 상대에게서 이해받을 기대도 하지 말고 이해할 수 있다는 기대도 하지 말지어다. 상대방이 나약하고 천박한 존재이며 나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아이를 갖는 일, 노후를 준비하는 일,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일, 학교 선생님 비위를 맞추는 일 등등을 하는 파트너로서 서로를 존중하자. 일상의 삶들을 누군가와 함께 경영해나가는 것만으로 인간은 인간으로서 답할 수 있는 고결한 이상을 달성하는 것이다. 사실 별로 재밌고 예쁘고 이런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이런 표현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고답스럽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삭막하다. 결국 낭만적 연애 그 이후의 삶이란 우리의 삶과 크게 벗어남 없는 지난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답조차 한 사람이 정답을 깨닫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며, 어떤 사람들은 일생을 이 사실들을 깨닫지 못하고 가면 속에서 외롭게 죽어갈 것이다. 스스로 의식을 변화하면 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또 쉽던가. 깨달음이란 알기만 한다고 그대로 행하게 되던가. 사실 이 문장 뒤로 수많은 나의 상념과 경험들을 썼다 지웠다 했지만 지우기로 하였다. 그럼에도 짚고 넘어가야만 할 지점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기대하지 않는 것을 이해받는 것을 기대하는 것들을 내 마음대로 하기란 그것도 실로 쉽지 않은 일이라. 지금도 외로울 사람들은 외롭고 그로 인해 떠나갈 사람들은 떠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커튼 탓이라고 하기에는 그것도 궁색하다. 그래도 이 소설은 어디로 우리가 가야 할지 생각해볼 수 있는 손가락질의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한 것 아닐까.


나도 글을 다 쓰고 다시 읽어보면서 결론이 아주 이상한 나쁜 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뭐 더 덧붙이기에는 하도 씁쓸하여 이상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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