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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인 Jun 01. 2017

벌써 일 년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언제부터였을까.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어서, 닥치는 대로 의미있어 보이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쫒고 지쳐 쓰러지는 삶을 살게 된 것은. 놓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시간을 꽉 부여잡고 매달려서, 나를 버리고 가지 말라고 울며 애원했지만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 불안이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당연한 것에 의문을 던지는 질 나쁜 버릇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내가 서 있던 토대를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는 모든 게 무기력해진다. 선택에 확신은 없었고 이런 불안은 결국 사랑마저 허물어버리고 말았다. 불안이 만드는 갈등은 불안을 재차 가중시켜 나를 공황장애와 강박증을 가진 환자처럼 만들었고 결국 소중한 사람을 앗아갔다. 나에게는 지킬 힘이 없었다, 내 한 몸 가누기 어려웠으니까.


그가 떠나고 난 뒤, 나는 그가 없는 혼자의 의미를 절박하게 찾았다. 나에게는 그를 상처입힌 이유가 필요했다. 그를 상실할만한 가치가 필요했다. 그를 곁에 둠으로써 겪었던 불안을 매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용서할 수는 없는 나를, 내가 정말로 죽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기위한 발버둥, 그 속에서도 감사하게도 위안받는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어김없이 지독한 고독이 찾아왔다. 그 불안은 나를 현실과 지속적으로 괴리시켰다. 매일 암흑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온 신경은 내딛는 한 발에 곤두서있어 금새 녹초가 되는 날들...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는 날의 연속...


그렇게 일년이 지났다.


잔잔한 감상에 젖어본 것도 벌써 아득한 지난 날,

애써 잘 외면하다가도 방 한구석 머물러있는 상자에 시선이 사로잡히는 날이면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런 날이면... 그동안 열심히 헤쳐나갔던 너 없던 시절도 모두 도루묵이 되고 만다. 멀리 달아났다고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내 마음에 차오르는 것을 보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그래... 옷장 아래 박스에는 아직도 그때의 너가 고스란히 있다. 보이지만 안보이는 척 했다. 빌어먹을 상자는 사 년이라는 시간만큼의 크기를 가지고 있기에 좀처럼 숨기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불투명한 상자 너머에는 흐릿한 실루엣들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듯 그자리에 고스란히 있다.


저 안에는... 누가 봐도 우리가 사랑했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겠지.


수 차례의 방청소 동안에도, 왠지 열어보기 꺼려지는 지난 날의 가족앨범을 펼쳐보는 날에도 조금도 열리지 않았던 상자였다.


분명 현실이었는데 이제는 꿈보다도 더 꿈같은 날들이 되어버렸다. 아련한 잔상만이 남아있다.


불현듯 솟아오르는 꿈의 파편들은 지난 일년동안 가끔씩 예고없이 찾아왔다. 홀로 집에 돌아가는 어느 날 저녁에, 큰 보름달 아래에서, 제주도의 파도 앞에서, 어지러이 방황하던 새벽길에서, 너의 흔적이 남아있는 캠퍼스 많은 곳에서...


넌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은 한 적 있을까...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의미인가 싶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다. 나에게 넌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너는 나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 새로운 시작이 너무나도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나에게 나쁜 사람인걸까? 반대로 나와 헤어지고 금새 다른 사람을 만나며 행복해하는 널 보면 나는 꽤나 잊기 좋은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건 내가 어떤 의미로는 너에게 좋은 사람이었던 거였을까? 기뻐해야 하는 일일까?...


누군가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한다. 그래, 그렇지만 그 다음에 오게 될 것은 무엇일까. 지금으로서는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 혼자라는 두려움에 굴복해버린 불쌍한 한 사람이,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올리기 위해 애써 뺨 근육을 사용하고 있지 않을까.


백날 논리적인 척, 많이 아는 척 쉼 없이 입을 놀려보지만 빈수레가 살려달라는 절규로 요란할 뿐이다.


그 상자를 열어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상자를 버릴 수 있게 되는 날이 올까.

그때 나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다가오는 사람마저 밀어내고 있는 지금,

내가 겪는 불안은 실체가 있는 걸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게 확실할 뿐.

오늘도 정체 모를 불안이 나를 빈틈없이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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