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 군대 생활 끝나기 전에 통일되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춥기만 했던 훈련소에서의 겨울. 각다분한 하루의 훈련이 끝나고 얼어버린 몸을 녹여주는 건 따뜻한 편지 한 통이었다. 엄혹한 유격훈련이 있었던 그날, 전투복은 흙먼지 범벅이었고 세찬 바람으로 모래를 많이 마셔서인지 잔기침은 당최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자리에 돌아오니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삐뚤삐뚤하고 못생긴 글씨, 그것도 연필로 큼직하게 쓴 보내는 사람 ‘이세훈.’
열한 살 배기 꼬맹이 세훈이가 훈련소에 있는 형을 생각해 직접 편지를 쓴 것이다. 짧은 일기 쓰기도 억지로 겨우겨우 쓰는 철부지 초등학생이 제 기준으로는 엄청난 장문의 글을 써서 편지를 부쳤다는 생각에 대견하고 고마웠다.
컴퓨터 게임과 먹을 것을 좋아하는 이 ‘초딩’은 내가 입대 전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잔정이 많이 든 아이다. 어머니와 자매처럼 친해서 이모같이 느껴지는 분의 아들인 이 어린이와 과외 형식으로 1년 남짓 기간을 같이 보냈다.
외동아들인 당신의 자식이 쾌활하고 똑 부러지게 성장하기를 바라셨던 아주머니는 내게 과외 선생님 외에도 여러 좋은 역할을 기대하셨다. 나는 내 나이의 반절인 그 꼬마와 많은 얘기를 나눴고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집도 가까웠기에 세훈이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고 어머니에게 “형은 언제 와요?”, “대학생은 학원 안 가요?” 등의 질문을 하며 대학에서의 여러 활동으로 부산히 지내는 나를 기어이 보고 가겠다며 밤늦게까지 집에 안 돌아가고 몇 번이나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세훈이의 편지는 역시나 먹을 것 이야기로 시작했다. 입대 전 같이 간 적 있는 동네의 고깃집에 휴가 나오면 다시 가자는 것이다. 또 <무한도전> 달력을 선물 받았다며 나중에 보여주겠다고 한껏 자랑을 한다. 기뻐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용돈도 얼마 되지 않는 초등학생이 초코파이나 뭐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얘기하란다. 돈 모아서 한 통 보내주겠다며 높은 사람이나 교관에게 나눠줘서 잘 보이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어찌 형-동생 관계가 역전된 듯한 마음에 살며시 웃으며 계속 읽어내려 가는데, 초등학생 특유의 엉뚱한 질문도 나온다.
“군대 변기는 의자 변기야? 아니면, 쭈그려서 앉는 변기야?”
이 아이는 별 게 다 궁금한가 보다. ‘의자 변기’라고 답장에 써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서없이 전개되는 초딩의 난삽한 문장들 속에서 제법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는 구절도 발견됐다.
“형, 여기는 아줌마도 건강하고 전부 다 잘 지내. 형 몸 잘 지켜.”
하나뿐인 자식을 겨울에 군대에 보냈다고 불철주야 걱정하실 게 분명한 섬약하신 (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어머니. 훈련소에서는 전화 통화가 자유롭지 않아 특히나 궁금했던 어머니의 안부를 이 꼬마가 따뜻하게 전해주었다.
“형 군대 생활 끝나기 전에 통일되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형 군대 생활 끝나기 전에 통일되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바람은 남과 북이 처한 현금(現今)의 복잡다단한 정치적•군사적 현실을 떠올리기에 앞서 그저 순수하고 맑다. 한편으로는 이 아이가 군대를 가게 될 10년 후쯤에 통일이 이뤄질 것인가를 자문해보면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굵은 연필심으로 쓴 편지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난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조만간 A대학교 후배가 될 세훈이가.”
형이 다니는 학교가 유일무이한 최고의 대학인 줄 아는 세훈. 이 귀여운 초등학생은 날 끝까지 웃게 했다. 정치(精緻)한 맛이 없어 오히려 더 정겨운 초딩의 편지는 힘들었던 훈련소 생활에 큰 힘이 됐다.
바로 답장을 쓸 채비를 하는데 하루 종일 떨어질 생각을 않던 잔기침이 어느덧 멈춰있었다. 열한 살 어린이에게 여러모로 참 신세를 많이 졌던 것 같다. 휴가 나가면 세훈이가 좋아하는 그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사줘야겠다.
*군 복무 중이던 20대 초반, 노트 어딘가에 적어놓은 글을 다듬어서 올립니다. 자연히 글의 시점도 군대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