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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Jun 02. 2017

거짓된 것들을 죽이고 죽여서

홀로 마주선 민희,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친구와 대화를 했다. 세상에 거짓들이 너무 많다. 없어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 말을 하므로써 우리는 면죄부라도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도 거짓되기는 마찬가지라고 자조섞인 웃음 한 큰 술. 그저 우리는 스스로가 거짓되어있음을 빈번하게 깨달을 뿐이었는데, 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 또한 우리가 자신이 판 부끄러움이라는 무덤에 절박하게 기어들어가는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음날 영화를 봤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제 1 막


영희는 낯선 나라로 떠나온다. 영화 감독인 유부남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영희는 그를 기다리지는 않기로 다짐한다. 서울을 떠나온 영희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간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며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은 다 거짓일 뿐이다. 그래서 영희는 낯선 공원의 다리 앞에서 절을 하며 기도한다. 영희는 친분이 있는 언니 지영에게 말한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다짐해보고 싶었어.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나답게 사는 거야. 흔들리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답게 살기로 했어.


물론 다짐으로 시작한 영화는 그 기대를 배신하기 마련이다.


영희에게 사랑은 단순하다. 욕망이 이끄는 것이다. 마음이 동하는 것. 결혼 생활을 오래도록 하다가 헤어진 지영에게 영희는 남편이랑 잘 살았는데 왜 헤어졌냐고 묻는다. 지영은 원해서 산 게 아니라 필요해서 살았다고 답한다. 남자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말 속의 여백에는 사랑만 빠져있다. 물론 세간에서 볼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부부. 때로 우리는 진실을 눈감는데 타고난 재주가 있다. 하지만 결국 지영은 홀로 낯선 도시로 떠나오지 않았던가.



영희는 거짓들이 한심스럽다. 하지만 그녀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그녀도 서울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해 도망쳐 왔기 때문이다. 누군가 도망쳐 온 곳에는 지옥 밖에 없다고 하였던가. 어떤 남자가 자꾸 영희를 따라온다. 처음 그 남자는 지영과 영희에게 시간을 묻는다. 그리고 그림자처럼 영희를 따라붙다가 결국 첫 장의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영희를 들쳐메고 사라져버린다. 이 남자는 누구인가? 시간인가? 죽음인가? 아니면 신?


어쩌면 영희는 정말 죽어버린 걸수도 있다. 진정 자유롭고자 발버둥치다가. 뭐. 어차피 언제가 되었든 인간은 죽는다. 그 남자에 의해서건, 모래사장에서 꿈 속을 열심히 떠돌다가 얼어죽던. 그렇기때문에 영희는 지금 눈 앞의 생을 찬미하고 현재 속에 살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온전히 솔직해지는건 어렵다. 그가 이곳으로 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수백번 말하면서도, 영희는 자꾸 내가 그사람을 생각하는만큼 그사람도 나를 생각할지가 너무나 궁금하다. 그리움이 유일한 진실된 사랑의 증거임에도 여전히 영희는 어리석게 거짓속을 배회하며 그렇게 과거의 시간에 휩쓸려 사라진다. 시간인지 남자인지가 야속하다.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두 번째 장으로 이어진다. 마치 죽은 자가 누군가의 실수로 삶을 돌려받은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스크린을 통해 응시하는 영희의 두려운 표정으로 또 영화는(삶은) 시작된다.   



                                            제 2 막


한국으로 돌아온 영희는 강릉으로 떠난다. 강릉은 서울이라는 거짓된 삶에서 도망쳐 온 순례자들의  도시. 영희는 여전히 배회중이다. 그리고 우연하게(또는 필연적이게) 그녀의 앞에 그녀를 가로막고 서있던 것들이 인간 군상의 모습으로 현현하게 드러난다.


젊고 건강해보였던 명수 선배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초라한 모습만 남았다. 준희는 명수가 만나는 여자때문에 그가 늙어버렸다고 말한다. 명수는 입을 열때마다 시시한 소리만 뱉어낸다. 너도 결혼 해야지. 그럭저럭 살 지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니? 사람은 생각으로 사는거 아니야. 살고 싶으니까 사는거지. 명수는 애인인 도희를 친한 친구라며 우스갯소리로 일축하면서도, 콩 좀 골라내라는 도희의 타박에 조용히 콩을 골라낸다. 흔한 사랑의 종착역. 여자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삶도. 영희는 그런 명수가 우습다.


선배도 사랑하지 못하니까 사는거에 집착하는거죠? 진짜 사랑을 못하니까! 그거라도 얻으려고 하는거죠?


영희는 거짓들이 지긋지긋하다. 다 비겁하고. 다 가짜에 만족하고 살고. 다 추한 짓 하면서 그게 좋다고들. 그녀는 더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거짓된 것들은 다 죽어야한다. 영희는 마음이 동하는 것만을 믿고 움직인다. 영희를 오직 진짜 영희로만 불러주는 준희와의 키스. 이내 여자와는 처음 키스해 본다며 더는 여자와 키스는 더 안 할거라며 경쾌한 웃음.



이제 영희의 눈에 함부르크에서 영희를 따라다니던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소리를 내며 창문을 닦지만 영희에게는 닿지 않는다. 마치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버린듯, 영희는 홀로 해변으로 나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시간을 유영한다. 그곳에서 영희는 영화 감독인 그사람을 다시 만난다. 그토록 보고싶었던 사람이었는데 그사람은 이제는 헛되어 버린 소리만 반복한다. 가만보니 명수 선배처럼 그사람은 일거에 늙어 할아버지가 다 된 것 같다.



후회하세요? 정말 후회하세요?
계속 후회해! 매일같이 후회해! 지긋지긋하게 후회해!
후회하지 마세요.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계속 후회가 되는걸 어떻게하니! 그렇게 아픈데 계속 후회해야 되는걸! 누가 좋아서 하냐? 근데 그것도 자꾸 하다보면 달콤해져. 그래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계속 후회하면서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어.


흘러가버린 영희와의 과거와 젊고 예쁜 여자들로 상징되는 미래의 사이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상원. 상원에게 사랑이란 시간에 휩쓸려버린 자신을 가여워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원은 영희를 제물로 한 영화를 만듦으로써 스스로 면죄부를 발행하고, 심지어는 삶에 빌붙을 제사를 지내려고 한다. 후회하며, 달콤하게, 삶을 꿈이라 속여가며. 이런 것도 사랑일까. 상원은 영희에게 체호프의 <사랑의 관하여>를 낭독해준다.


사랑을 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상원은 침통한 표정으로 책을 덮고 제자들에게 묻는다. 이거 괜찮지? 그리고 영희에게 책을 건넨다. 그렇게 살아가지도 못하면서. 상원에게 진실한 사랑도, 영희도 한낱 패션일 뿐. 진실을 행하지 못하는 부끄러움만으로, 모든 거짓의 죄가 사해질 것이라는 착각속에서 상원은 삶을 살아간다(죽어간다). 영희는 그대로 책을 두고 홀로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 그리고 꿈에서 깬다.



다시 또 해변.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그런데 영희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그녀는 삶의 외연을 넓혀나가듯이 유유히 해안가를 마주하며 나아간다. 영희를 가로막는 것들은 꿈처럼 사라지고 그녀를 위협하던 '남자'는 보이지도 않는다. 영희는 해변에서, 혼자, 석양을 맞이한다. 이제 자기답게 살기를 바라는 기원의 절도, 체호프의 책도 필요 없다. 온갖 거짓들은 영희의 꿈속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거짓된 것들을 죽이고 죽여서. 비로소 영희는 오롯이 자신과 독대한다. 단독자로써. 영희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것이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 고독하게. 하지만 그녀가 거닐 밤의 해변이 그렇게 쓸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어디선가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가 안온하게 흐른다.



                                                 덧


알량한 글을 써재끼는 밤이 지나고. 나는 더이상 면죄부는 받지 않기로 했다. 조금 덜 부끄럽고 조금 더 고독한 가운데. 내 속에서 좀 더 확실해지고 명료해지는 것들. 글을 써나가면서 그것들에 조금 더 집중해보기로 결심하였다. 한 번 살아보자. 우리는 이야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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