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많은 약속들을 애매모호한 영역으로 제쳐두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만남은 아무리 신중하고 조심했어도 성급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거에요. 우리는 만나고 나서야 함께 지켜야 할 약속들을 비로소 하나 둘씩 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지킬 수 있는 약속들이 같았기에 만남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지킬 수 없는 약속들을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서로를 괴롭히고 힘들어했을까요.
처음부터 당신과 내가 사랑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천진난만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사랑에 눈멀어 제쳐두고 만 것들이 우리의 사랑을 멀게 만들어 버렸군요. 그럴 바에야 사랑의 경계를 받아들이고 좀 더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만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랬다면 참 좋았을텐데. 아니 이제와 생각하기엔 이건 너무 슬픈 상상이네요.
우리가 사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만약 그저 좋았기 때문이라면 제 말좀 들어보세요. 그렇다면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요. 이제는 제가 싫어졌기 때문인가요? 달라진 건 처음보다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뿐인데요. 그런데 왜일까요. 저 역시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더 많이 미워하게 됐어요. 그래서 누군가를 탓할 문제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사실 당신도 나를 많이 사랑했다는 걸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 당신이나 나나 결국에는 자기 자신 편일 수밖에 없다는... 사랑의 마지막이 참 슬퍼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기쁘고 행복했어요. 당신도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속삭였을 때, 행복했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일, 그것보다 세상에 위대한 일이 있나요?
아,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 기쁨이 비록 스스로에게 나와서 스스로에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잘 유지되었다면 얼마나 서로에게 좋았을까요.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음을 알았으니 우리 포기하기로 해요. 수많은 대화와 다툼과 화해 속에서도 결국 팽팽히 당겨진 줄은 끊어지고 말았네요. 끊어진 각각의 줄이 자신에게로 튕겨져 돌아가듯, 슬퍼도 우리 각자 자신에게로 돌아가기로 해요.
그래요.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그래도 각자의 삶이 끝나는 건 아니니 멀리서 응원정도는 해주기로 해요. 한 때 사랑했던 사이였으니 그정도는 괜찮겠죠? 제가 응원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아참, 다음에 연애할 때는 계약서 쓰는 거 잊지 마세요. 상대방이 뭐하는 짓이냐고 난색을 표해도 굴하지 않고 계약서를 꼭 쓰도록 하세요. 우리 앞으로는 그런 솔직한 연애로 서로에게 덜 상처주는 삶을 살기로 해요. 그럴 수만 있다면...
그동안 제가 당신에게 참 많은 것들을 요구했어요. 당신, 많이 힘들었죠? 외로웠고 또 외로웠고 많이 외로웠어요. 많이 힘들고 많이 아팠어요. 많이 슬프고 많이 울었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러니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당신을 떠나는 것을 용서해주세요. 미안해요. 제가 많이 사랑했던 거 알죠? 그럼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