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mas in Nell's Room
12월 17일 뉴욕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자리에 앉아서 메모장을 켰었다. 올해의 느낌을 요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주저리주저리 풀어서 설명해 보려고 했지만 그저 "꽤 많이 힘들었다."라고 적었다. 그렇다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작년은 숨쉬기 조차 힘들었고, 이유 없는 우울에 잠에 들기 조차 두려웠었다. 그런 시간들에 비해 올해는 비교적 수월했다. 꼭 힘든 일들이 있어야만 삶이 힘든 것은 아닌가 했다. 잠을 잤다 해서 피로가 반드시 회복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뭔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작년의 나는 행동의 책임에 대해 배웠다. 어느 정도 실수를 해도 용서가 가능했던 고등학교 시절은 드디어 끝이 났었고, 매 순간에 내리는 선택에 대한 책임에 쫓기면서 첫 대학 학기를 마무리했다. 선택 뒤를 따르는 책임을 안다고 해서 그 책임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잘해야만 한다"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왜 내가 이런 수업을 위해 3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며칠간 밤을 새우다 겨우 쓰러져 자고는 저녁 수업을 놓쳐, 더욱 큰 우울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다시 붙잡아 보려 했던 사랑은 내 마음에서 흘러넘치는 우울의 가시를 담아주지 못했다. 내 목소리로 말을 거는 환청에 시달리며 잠에 들었다.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겐 "계획 안에 없던" 것들이었다. 나는 저번 해를 기점으로 조금은 책임에 익숙해질 줄 알았다. 강압에서 벗어날 줄 알았고, 우울을 조금은 멀리할 줄 알았으며, 똑같은 관계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환청 같은 것은 책에서만 나오는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강압을 인지했지만 벗어나진 못했다. 우울은 약을 먹는다고 사라지진 않았다. 익숙했던 관계의 품의 따뜻함을 멀리하지 못했고, 환청은 실제로 나를 찾아왔고 아직도 간간히 나를 부른다.
그러곤 참 말도 안 되게 몇 달 뒤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매일 웃고, 즐겁게 살았다. 드디어 전공 수업이라는 것들을 들어보면서 실력을 확인받고, 며칠간 학교에서 친구들과 해가 뜨고 달이 뜨는 시간을 함께 하고, 이전 학기만 해도 지옥 같게 느껴졌던 것들이 축복으로 탈바꿈해 나를 반겼다. 좁디좁아 숨 막히게 나를 조르던 고등학교의 인연들 외에도 나를 바라봐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주며,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럴 수도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도 웃을 수 있다는 게 어딜까, 그래도 작년처럼 죽지 못해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 아니라 다행이니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면서 한국 땅을 밟았다.
입국 심사를 완료하고, 집에 짐을 풀고 어찌어찌 정신을 차려 보니 22일이 돼 있었다. 아, 오늘이 벌써 넬(Nell)의 크리스마스 콘서트가 시작하는 날이었나. 작년에는 손을 꼽아 기다렸었는데 올해는 기대도, 긴장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공연장에 도착해, 굿즈를 사고는 공연을 보려고 자리에 앉았다.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완전 무장해제가 됐던 나는 첫곡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한 Slip Away부터 시작해서 Newton's Apple, Separation Anxiety까지. 공연의 중간도 도달하지도 않았지만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정말 힘들었다. 그러곤 앙코르 전 마지막 곡이었던 Movie가 나오기 시작하자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보컬 김종완은 이 노래를 "내려놓는 노래"라고 설명했다. 정말 말 그대로의 무대였다. 잔잔히 시작하고선, 폭발적으로 몸 안의 에너지를 터뜨리듯 연주하고는 각자가 악기를 내려놓고 말 한마디 없이 무대에서 사라졌다. 차마 말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미안해 내 재생능력은 이제 한계
소멸돼 버린 꿈의 재생 그딴 건 이제 불가능해
너무 쉽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이지 그동안 꽤 많이 힘들었어
그만 포기할게
이젠 그만둘래
그냥 현실 앞에 무릎 꿇고 살아 갈래
넬(Nell) - Movie
꽤 많이 힘들었다는 생각은 징그럽게도 많이 했고, 많이 할 것이다. 나는 원체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눈 앞에 행복이 놓여 있어도 그걸 잡을 생각보다 그게 사라지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부터 든다. 다 내려놓아버리고, 나의 책임으로부터, 우울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목소리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해가 환히 비추는 낮에 일부러 잠을 자곤 한다. 그렇게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지만, Movie에 이어서 나온 Sing for me의 가사처럼 다시 돌아올 테니까. 난 분명 그럴 거니까 너도. 다시 만나질 때까지 꼭. 기다리겠다고 약속하기로 한다. 그 가사의 네가 무엇이든, 누구가 됐던, 정말 "계획에 없었던" 순간들의 반복 속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24일의 마지막 공연 후에 베이시스트 이정훈이 트위터에 글을 하나 올렸다.
자꾸 뭐가 끝나요. 또 뭔가 시작하면 되는 거겠죠.
그럼 그렇다. 끝나는 것들이 참 많지만 분명 새로 시작하는 것들이 많으니까. 아직은 포기하지 말아야지, 싶다. 작년은 불행하진 말자고 생각했지만 올해는 조금 더 행복했으면 한다. 나도, 당신도, 그 누구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