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리니 Jul 26. 2023

당신을 소개하는 두가지 키워드

새로운 부서에 발령이 났다. 불안과 긴장 90%에 약간의 설렘 10%가 버무려진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신규직원 환영 오찬에 참석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안내 메일 하단에 꼭 준비하라는 게 있었다.


'나를 소개하는 키워드 2개'


이게 뭐지? 전임자에게 물으니 이 부서에서는 늘 그렇게 자기소개를 한다고 했다.


즉석에서 물으면 오히려 생각 없이 쉽게 대답할 텐데, 미리. 그것도 '준비'하라고 하니 매우 부담스러웠다.


나는 원래 말재주가 없다. 같은 이야기도 내가 하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입을 떼야하는 상황을 즐기지 못한다. 오히려 생각만 해도 불안하다. 거기에 누구보다 상대방의 표정과 말투는 빨리 읽는다. 때문에 내 이야기에 지루함을 느끼는 상대 반응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


그래서 이런 숙제를 받을 때마다 매우 난감하다. 남들보다 더 많이 고민을 해야 한다. 이틀 내내 생각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고민, 또 고민을 했다.


동기들 카톡방에 키워드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10년이 넘게 회사에서 또 사적으로도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다.


동기왈


"부처님 어때요 언니. 언니는 감정 동요가 없고 차분하고 이성적이니."

(나는 기독교 신자이고 내 동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고깃집 어때요?"

(얼마 전에 동기들이랑 이야기하다가 새로운 부서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서 차라리 그만두고 바닷가에 가서 '고깃집'을 차리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남편에게 부탁했다.


남편 왈 "해당화 어때? 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여보. 그건 건배사잖아.)


고민 끝에 평이한 키워드 두 개를 골 나눴다.


'엄마' 그리고 '자연인'

나는 아들 둘 엄마이고, 틈만 나면 도시를 떠나 자연을 찾는 사람이라 나를 설명하기에 가장 무난한 키워드였다.


그런데 이틀 동안 나를 설명할만한 단어를 찾다 보니 생각이 내 직업에까지 잇닿았다.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영역이 '일'이니만큼  내가 왜 이 직업을 택했고 이 일을 통해 어떤 의미와 보람을 얻는 지까지.


신규직원 오찬 자리에서 내놓기에는 너무 진지한 주제이지만 어딘가에 글로는 남겨보고 싶었다.  


내가 품은 또 하나의 키워드는 '사회복지공무원'이다.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움을 받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청소년기를 보냈고,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갚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사회복지'는 사람을 전문적으로 돕는 일이다. 그런데 '사회복지공무원'이 되어 마주한 것은 사람보다는 종이에 갇힌 삶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한글문서와 엑셀파일을 작성하거나 취합하고 보고하는데 쓴다. 주민센터 일선에서 근무하지 않는 한,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일보다는 시스템으로, 전화로 대면할 일이 훨씬 많다.


또 돈 계산과 돈을 쓰는데 수많은 시간을 보낸다. 람들의 삶의 질 높이는 데는 결국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의식주는 물론이고, 안전과 건강, 행복을 위한 정부의 모든 도움은 예산. 곧, 돈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공무원으로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재미가 없다. 하지만 돈 없는 내가 남의 돈(나라 예산), 그것도 수억, 수십억 단위의 큰돈을 수십만의 사람을 돕는 일에 쓴다고 생각하면 나름의 의미와 재미가 생긴다. 내 돈은 만 원도 누군가를 돕는 데 쓰기가 아깝지만, 예산 1억으로 남을 돕는 일은 전혀 아깝지가 않다. (막 쓴다는 것은 아니다.)

벌서 십몇 년 전, 공부할 때 교수님 들은 이야기가 한 번씩 생각을 스칠 때가 있다.


'사회복지 실천 현장에서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사회복지 정책 한 줄로는 수십, 수백만명의 삶을 바꿀 수 있다.'


말단 공무원 나부랭이이지만 계획서 귀퉁이 한 줄에 의해 사람들의 삶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갑자기 일에 작은 무게와 의미가 더해진다.


'키워드 개'에서 출발한 생각이 나래를 달고 예상치 못한 지점까지 흘러갔다. 돌이켜보니 부담스러운 숙제가 삶에, 일에 좋은 레슨이 되었다.


그리고 막상 부서 식사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통해 서로의 키워드를 나눠 듣고 보니 xx팀 김 00이 아니라 매일 농구를 하는 김 00, 여름을 좋아하는 박 00으로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된 당신께도 오늘 하루 숙제로 당신을 설명하는 두 가지 키워드를 떠올려 보시길 권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보이지 않는 아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