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구형 핸드폰의 용량 부족에 시달려왔다. 뭘 하나 사면 웬만해선 잘 바꾸지 않는 성격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일정 기간마다 사진을 랩톱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 친구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겉은 꽤 유행의 그것처럼 보이지만 알맹이는 그저 올드스쿨이라며 핀잔을 준다. 맞는 말이지. 그렇다고 올드스쿨이 꼭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부지런히 파일을 옮기고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한 달, 한 달의 기록을 곱씹을 수 있으니까. 그러다 문득 항상 뒷전으로 미뤄왔던 질문이 떠올랐다. '혹시 지금 나는 인생을 기록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출라야논 시리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2014-19
인류의 과거와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것을 꼽으라면 '기록'이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할 거다. 인간은 언제나 삶을 어딘가에 기록해 왔는데, 남길 곳이 마땅치 않으면 돌벽이라도 쪼아가면서까지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적어냈다. 예수의 말씀은 성경에, 조선 왕들은 사후 실록으로 기록되었고, 요즘 웬만한 연예인의 활약상은 나무위키에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죽기 전 인생을 회고하려면 무엇을 봐야 할지 생각했다. 어릴 적은 비교적 간단해 보인다. 부모님께서 만들어주신 사진앨범을 보면 되니까. 고3 시절은 특별히 1년 정도 일기를 쓰기도 했으니 활자 데이터도 있는 셈이었다. 이후가 좀 복잡한데,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적극 활용하는 순간부터 채널과 방식의 경계가 흐려졌다. 인스타그램만 하더라도 아이디 하나만 사용한 것도 아닐뿐더러 어느 새부터는 전시회 아카이빙 용으로만 사용한 지 오래였다.
쇼 시부야, 2022년 3월 3일 / 출처: 쇼 시부야 인스타그램 @shoshibuya
예술가 중 누군가도 좁게는 자신의 하루를, 넓게는 세상의 하루를 담아내는 고민을 한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 작가 쇼 시부야(Sho Shibuya)는 뉴욕타임스의 1면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뉴욕시가 코로나19로 락다운이 걸리자 그는 신문 표지에 아침 일출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볼 수 없는 패닉 상태에도 그날그날의 빛을 기억할 수 있도록.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폭격이 있었던 날엔 어김없이 우크라이나 국기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상을 선보이고,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키가 생을 마감한 날에는 플리츠 형태의 검은 종이 한 장이 신문에 덧대지기도 한다.
쇼 시부야, 2022년 8월 10일 / 출처: 쇼 시부야 인스타그램 @shoshibuya
태국 작가 출라얀논 시리폰(Chulayarnnon Siriphol)의 작업 방식도 무척 흥미롭다. 그의 작품은 매일의 신문을 오려서 만든 콜라주로, 그 기간이 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던 2014년부터 총선이 열린 2019년까지였다는 점이 이목을 끈다. 군부에 의해 통제되는 뉴스를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예술가이자 국민으로서 주권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어디에,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찰이 느껴진다.
출라야논 시리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2014-19
이들의 작품을 잠시 되새김하고 난 후 다시 나의 문제로 돌아온다. 세상을 기록하는 것보다 자신의 하루를 담아내는 게 훨씬 중요한 소시민의 고민으로. 월간 윤종신 느낌으로 한 달을 정리하는 식으로는 어떨까. 아니면 나도 다이어리를 구입해 소위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해야 하나. 무엇이, 어디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저 흘러가는 날이 아닌 내가 살아낸 날을 기록하다 보면 되겠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관성이 생겨 더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림은 못 그리니까, 나는 글을 적어야겠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