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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퓨레 Nov 19. 2022

스마트하지 않은 여행일지

스피노자 VS 스마트폰, 당신의 선택은?

장줄리앙 전시 <그러면, 거기>

서울역에 도착했다. 지방 결혼식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가만 보자. 집까지는 이래저래 사십분쯤 걸리겠군. 핸드폰 전원은 꺼져있었다. 보조배터리를 챙겨 갔지만 친구 녀석을 잠시 빌려줬더니 전력을 모두 빨린 채로 돌아왔다. 별 수 없지. 그저 이대로 집까지 도착해야 하는 여정이군. 오랜만에 사람 구경하면서 가야지.


남색의 지하철을 타기 위해 플랫폼에 올라섰다. 이내 열차가 도착한다. 열차 안에는 빈자리가 아주 많았다. 가장 편해 보이는 은빛 손잡이 봉이 있는 가장자리에 앉는다. 사람이 적은 열차네. 사람이 없어 좋은 건지 아쉬운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뒤로한 채 칸 내부를 둘러본다. 어디 읽을 거리라도 없나. 핸드폰 없이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처럼 활자 비슷한 것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화장실에는 샴푸통이라도 있지. 지하철엔 별다를 읽을 것이 없었다. 그 많던 지하철 광고는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혀 스마트폰으로 들어갔나 보군. 지하철의 광고 칸은 비어 있거나 그저 재미없는 국가 정책 광고가 도배돼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시청역에서 네 명의 가족과 한 명의 여성이 승차했다. 가족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지 수트케이스 두 개가 딸려들어왔다. 그들은 줄줄이 사탕처럼 자리를 잡았다. 아빠, 아들, 딸, 엄마. 이 순서는 어디서든 자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유전자 염기서열같이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시퀀가의 아닐까 싶다. 딸은 엄마에게 여행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로 재잘거리고 있다. 다른 한 명의 여성은 반대쪽 끝에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봉에 이마를 기대는 걸 보니 몹시 피곤한 하루였거나, 아님 약간의 알코올을 마셨을 수도 있겠지 싶다. 지하철에서 지긋이 누군가를 보는 것이 혹여나 오해를 살까 싶어 잠깐의 관찰을 마치고 시선을 거뒀다.


한 번의 환승을 마치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걷기라도 하니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는데. 마침내 폰 없이 노는 것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약간의 승부욕이 인다. 이대로 심심함을 인정하는 건 지구 최후의 아날로그인(人)을 자부하는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최근에 읽었던 책 생각을 해볼까. 사실 오늘도 헤밍웨이의 시집을 챙겼었는데 집을 나서기 직전 가방에서 책을 뺐다. 대신 그 자리에는 블루투스 키보드가 자리했다. 어느새부턴가 펼치지도 않을 텐데... 하며 책을 넣다 뺐다 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최후의 아날로그인으로서 잠시 반성을 시간을 갖는다.


직장 동료이자 친한 형인 K가 떠오른다. 그는 디지털 알러지가 있다. 아니 디지털 포비아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요가와 명상을 즐겨 하며, 단신으로 발리에 요가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마음 공부인가 마음 수련인가 비슷한 것도 하고 있다고 언젠가 말했었다. 그리고 K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일 년에 많게는 오십 여권 정도 책을 읽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대화할 때는 가끔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멋지다.


그의 진정한 멋짐 포인트는 사실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K가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유튜브 앱을 삭제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잠깐 그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만날 때마다 물어봐도 다시 깔지 않았다고 하더라. 유튜브가 없는 삶이라. 상상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2022년에 등장한 이 시대의 아날로그 싯타르타가 아닐까? 마치 팔선녀의 유혹에도 아주 잠시 미간을 찌푸릴 뿐, 그 이상의 동요 없이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 성인을 곁에 둔 느낌이다.


어라. 사념의 늪에 허우적대던 중 어느덧 내릴 차례가 됐다. 코트 매무새를 다잡고 길었던 여정을 마무리한다. 스마트폰 없는 지하철이 이렇게 심심했던가. 아니, 이토록 즐거웠던가. 보조배터리로 자신의 배를 채운 유다 같은 배신자 친구여. 네 덕에 나는 오늘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았구나. 내 너를 사랑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유튜브는 지울 수 없어. 이게 내 결론이야.


#다음off는언제가될려나

장 줄리앙 <그러면, 거기>

~2023년 1월 8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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