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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퓨레 May 09. 2023

길에 올라 선 그대를 위해

미술 감상에도 정해진 길이 있을까?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 @서울시립미술관(북서울관)


잭 케루악 악의 소설 <길 위에서>의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는 책을 쓰는 작가다. 그는 작가로서 날아오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주변은 소위 지식인들 뿐 당최 날것의 영감은 찾을 수가 없다. 어딘가를 향한 샐의 갈증은 딘이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폭발하는데, 이후 둘은 미 대륙을 횡으로 종으로 넘나들며 모든 보고 들은 것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구체적인 계획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기 때문에.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 여자, 미래, 그 모든 것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내게 진주가 건네질 것이다.
- 잭 케루악, 『길 위에서』, 민음사, 2009, p.22 -

에드워드 호퍼, <와이오밍의 조>, 1946
잭 케루악, <길 위에서>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하는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명 또한 <길 위에서>라는 사실이 흥미롭다.(영어 표기는 달랐다.) 전시 제목만으로도 관객들로 하여금 에드워드 호퍼의 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증이 일게 한다. 기대했던 바와 같이 에드워드 호퍼 또한 여행을 통해 많은 영감을 받은 작가 중 하나다. 1925년 기차로 미국을 횡단하고, 이후 중고차를 구매하여 미국 서부와 멕시코 등지를 수없이 여행했다. 중년 이후로는 매년 여름이 되면 뉴욕을 벗어나 케이프 코드로 휴가를 떠나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갈 정도니, 샐과 딘 못지 않게 한 '방랑' 하는 성향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를 파리, 뉴욕, 뉴잉글랜드 등 시대가 아닌 지역 중심으로 큐레이팅 한 점은 칭찬하고 싶다.


호퍼는 여행을 통해 시선을 환기하고 자연, 도시, 일상의 풍경을 자신만의 관점과 구도로 묘사하면서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간다.
- 전시 브로셔 중 발췌 -


에드워드 호퍼, <굿하버 해변에서 스케치하는 조>, 1923-24


"이제야 호퍼 느낌이 나네." 근처에서 들려온 한 관람객의 소회가 인상 깊었다. [파리] 섹션에서 [뉴욕] 섹션으로 넘어 가던 중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호퍼 느낌은 무엇일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고독, 우울, 공허, 외로움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릴 것이다. 파리의 풍경은 따뜻함과 초록의 생명력이 느껴졌기에, 아마도 그는 뉴욕의 회색빛이 드리운 그림을 보고서야 기대했던 호퍼의 그림이 나타났다고 반겼으리라. 재미있는 점은 호퍼는 한 인터뷰에서 본인은 정작 작품을 그릴 때 '도시의 고독' 같은 개념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물론 이후 다른 인터뷰에서는 반대되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소개하는 수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어떤 그림을 가져다 놔도 '어딘가 공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와 같은 고색창연한 멘트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작가가 다소 억울해 할지도 모를 일이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습작>, 1941 or 1942 - 포스터


모두가 기대하는 작품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오지 않았지만, 휘트니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던 해당 작품의 습작이 왔으니 아쉬우면서도 새로운 기분이 든다. 인적 드문 밤 혹은 새벽 거리에서 유일하게 빛을 켜고 영업하는 식당과 그 안의 네 사람의 모습에서 알수없는 도시의 외로움이 새어 나온다. 조금 비뚤어 감상해 보면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깨끗하고 밝은 곳>이 떠오른다. 늦은 밤 한 카페의 두 웨이터가 마감 조로 근무하고 있다. 카페에 마지막으로 머물고 있는 노인 고객이 자꾸 추가로 술을 주문하자 젊은 웨이터는 늦어지는 퇴근에 불만을 토로한다. 결국 억지로 노인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늦은 퇴근을 준비하는 젊은 웨이터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웨이터에게 빨리 퇴근 준비를 할 것을 권유하지만, 나이 든 웨이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늦게까지 카페에 남고 싶어." ... "잠들고 싶어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밤에 불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 어니스트 헤밍웨이, 『깨끗하고 밝은 곳』, 민음사, 2016, p.14 -


어니스트 헤밍웨이, <깨끗하고 밝은 곳>
에드워드 호퍼, <카페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 1906


누군가 깨끗하게 닦아 놓은 감상의 길을 반드시 걸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로버트 프로스트식으로 가지 않은 길을 갈수도 있고, 언젠가는 마하의 속력으로 질주해야 할 순간이 오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옳다.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
2023.04.20~08.20
서울시립미술관(서소문본관)
유료 전시(성인 기준 17,000원)
*일부 작품만 사진 촬영이 가능합니다.
에드워드 호퍼, <햇빛 속의 여인>,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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