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부터 '향수'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니치(niche)'일 것이다. 향수 분야에서만큼은 니치를 꺾을 단어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어느 곳에나 갖다 붙이기만 하면 최고의 것이 되어버리는 마법의 단어 '럭셔리' 마저도 향수 나라에서는 니치가 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무릎을 꿇는다. 아주 작은 조각품을 세워놓기 위해 벽을 오목하게 파 놓은 공간, 또는 마케팅 용어로는 틈새시장을 의미하는 이 단어. 덕분에 펜할리곤스, 바이레도, 딥디크 등 수많은 향수 브랜드들이 나만의 희소한 향을 표방하며 한국 시장에서 연타석 홈런을 때렸다.
메종 프란시스커정의 젠틀 '플루이디티' ⓒ 메종프란시스커정 홈페이지
마침 올해 사용하던 향수가 다 떨어져 백화점을 찾았다. 메종 프란시스커정이라는 브랜드의 젠틀 플루이디티(실버) 향수였는데, 큰 용량으로 새 제품을 구매할 작정이었다. 네, 뭐라고요? 매장의 매니저는 너무 인기가 많아서 상품이 품절됐다는 답변을 건넸다. 언제 입고될지 모른다는 첨언과 함께. 어쩌지? 잠시 생각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니치가 더 이상 니치가 아니잖아? 옆에 있는 바이레도는 더 대중적일 텐데 말이지. 갑작스러운 역발상에 스스로 무릎을 탁 치고는 곧장 샤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 향수 좀 보러 왔어요. 판매원이 시향 해준 향수는 블루 드 샤넬이었다. 우와, 딱 클래식한 상남자 향. 이제는 이 향이 니치일 수 있겠구나. 그런 시대가 온 건가.
샤넬의 '블루 드 샤넬' ⓒ 샤넬 홈페이지
요즘은 향수에 있어서는 전통 패션 하우스에게는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싶다. 남과는 달라 보이고 싶은 우리들에게 니치 향수 브랜드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패션 하우스는 브랜드 이름만 내세우던 과거의 태만을 뒤로하고 아주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재미없는 향수쯤으로 취급받았던 불가리는 현대 본점에 첫 퍼퓸 단독 매장을 열고 새로운 컬렉션을 공개했다. 퍼퓸과 에센스의 조합으로 56가지 시그니처 향을 만든다며, 향을 블렌딩 하길 좋아하는 요즘의 니즈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모양새다. 디올은 전시회를 열었다. 디올의 향에 무한한 영감이 되었던 꽃과 예술을 주제로 디올의 새로운 놀이터가 된 성수에서.
버튼을 누르면 향이 뿜어져 나온다. @ MISS DIOR EXHIBITION
디올은 전시장을 크게 디올의 향수 아카이빙을 구경하는 공간, 디올의 향수 '미스디올'을 주제로 예술가들이 제작한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 그리고 제품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자. 우리가 디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디올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강력한 브랜드 파워, 그리고 미스디올, 쟈도르로 대표되는 시그니처 향수 컬렉션들. 이번 공간에서 디올은 예술적 감성을 표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비록 흔하지만 너에게만은 특별한 그런 니치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작품은 미스디올 보틀 프레임을 단순하게 재해석한 작품이었다. 뭐, 이번이 전부는 아니니까. 다음에는 꼭 '니치' 기사 작위를 받기를 기대해 본다.
<MISS DIOR EXHIBITION> 2023.05.05~06.04 플라츠2(성수) 무료 전시(사전예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