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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퓨레 Nov 24. 2024

아껴 두었던 작품들을 이젠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다

장줄리앙의 종이세상 展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안일만을 추구하며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그런 인간이 되어 보낸 하루하루의 생활은 그의 재능을 우둔하게 만들었고 집필에 대한 의욕마저 약화시켰다.
 - 헤밍웨이, <킬리만자로의 눈> -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등장하는 주인공 해리는 소설가다. 창작활동에 매진하기보다는 인생을 흥청망청 소진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새로운 아내 헬렌과 함께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그는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 잘못된 조치로 다리는 괴사되기 시작한다. 유일한 이동 수단인 트럭까지 고장 난 상황.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앞에 두고 해리는 이제껏 아껴왔던 글감들을 곱씹는다. 나중에 쓸려고 아껴왔던 그것들에 대해서...


모처럼 평일에 연차를 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예매해 놨던 전시표가 생각나 친구에게 전활 걸었다. 장 줄리앙 전시표 두 장이 있는데, 같이 보러 갈래? 상대방은 전시를 좋아하는 이었으나 장 줄리앙에게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 줄리앙은 일 년에 전시를 몇 번씩 하는 거냐? 새로울 게 없을 거 같은데 가산까지 가기가 애매하네. 다행히 전시가 열리는 가산동은 아울렛이 밀집 돼 있는 쇼핑천국이었다. 패션을 좋아하는 친구였기에 전시회 보고 쇼핑을 가자고 그를 꾀어낼 수 있었다.


사실 평소 장줄리앙을 좋아하던 나조차도 이번 전시가 크게 기대되지는 않았다. 친구의 말처럼 그의 전시는 꽤나 자주 열렸던 것 같고,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작품세계가 발전하리라 예상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와 친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 줄리앙의 스케일은 더욱 커졌고, 세계관은 촘촘해졌으며, 유머는 기대 이상으로 잘 스며들어있었다. 전시회장을 나와 쇼핑몰을 거닐며 그의 행보를 되짚어봤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단순한 그래픽에서 시작했던 그였다. 어느 순간 유화를 선보이는 전시를 열기도 했고, 도쿄의 긴자식스나 성수의 EQL매장에는 커다란 그의 조형물(페이퍼 피플)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꽤... 대단하잖아?


지난주 고등학교 동창들과 집들이를 핑계로 모여 술잔을 부딪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요즘 나의 글쓰기에 대해 친구들이 한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는 요즘 나에게 날카로운 인사이트가 없다고 이야기했고, 또 다른 친구는 오히려 개인적인 사연이나 감정들을 언급하여 작가나 작품을 연결시켜 주니 좋다고도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런 답변을 했던 것 같다. 머리에 있으면 생각, 적어내면 글. 나만 가지고 있으면 죽은 글, 남들에게 보여주어 이런저런 다른 이야기가 생겨난다면 그건 살아있는 글. 바쁘면 바쁜 대로 꼭 쓰기, 여유가 있다면 조금은 치밀하게 써보기.


내 기준에 장줄리앙은 살아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다. 게다가 깜짝 놀랄 속도로 발전하기까지 하 어찌 대단한 작가가 아닐 수 있겠는가.  굿즈도 5만 원어치를 사 온 걸 보면 장사도 잘하는 천재일지도 모른다. 친구와 나눈 섣부른 대화를 곱씹어본다. 전시 자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나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에, 치열하게 작품활동하는 작가를 감히 내가!


평론가들은 헤밍웨이와 가장 닮은 캐릭터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글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주인공 해리를 꼽는다. 대작가도 자신이 부지런히 쓰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마당에, 장줄리앙이 전시를 자주 연다고 구시렁댔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하루였는가.


그는 확실히 파악한 뒤 훌륭하게 쓰고 싶은 생각에 안 쓰고 아껴 두었던 작품들을 이젠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써 보려다가 실패하는 일도 없겠지. 어쩌면 이제는 그 작품들을 끝내 못 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미처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튼 지금에 와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헤밍웨이, <킬리만자로의 눈> -


장줄리앙의 종이세상 展
9.27-'25.3.30
퍼블릭가산(서울 금천구 가산동 퍼블릭 가산)
유료전시(성인 15,000원)
10:30-19:30(월 휴무)
전시관람시 2시간 주차 무료


ⓒ 아보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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