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월 그토록 소망하던 베니스에 다녀왔습니다.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서였죠. 주변사람들은 "그렇게 전시도 자주 보러 다니고 재밌어하더니 가는구나." 하는 반응이었지만 저 스스로는 정말 다른 기분이었습니다. 미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심지어 지금조차 모르겠는 기분은 똑같은 내가 베니스 비엔날레를 보러 가다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시작은 친한 친구였습니다. 친구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함께 사는 친누나가 유명 미대의 석사까지 졸업한 재원이었죠. 사실 누나의 가방끈을 논하기 이전부터 친구네 집안은 예술에 대한 관심이 깊은 집안이었습니다. 제 기억에도 친구가 매번 방학이 되면 유럽 주요 미술관으로 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납니다. 방학 땐 만나기 힘든 친구였던 셈이지요.
그런 친구 녀석은 국내에서 좋은 전시가 있을 때면 저에게 함께 놀러 가자고 권하곤 했습니다. 사실 미술 전시뿐만 아니라 해외 뮤지션의 내한 콘서트 등도 항상 제안해 줬던 기억이 나네요. 덕분에 한두 번 따라다니다 보니 흥미로운 분야들이 추려지게 됐습니다. 콘서트도 한동안 열심히 다녔지만, 마지막까지 재미를 붙인 건 미술 전시였죠.
친구는 미술 작품과 전시회를 오롯이 즐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재밌는데?" "흥미롭다!" 친구는 이 두 가지 표현을 자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저는 작품을 공부의 대상으로 봤습니다. '이번에 만났던 작가를 공부해 놓고 다시 만날 땐 더 깊이 있게 감상해야지.' '작가의 다른 작품은 뭐가 있을까?' 그래서 항상 이쪽 세계는 조금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다만 조금씩 반가운 작가와 작품들이 생기기 시작하긴 했지만요.
친구는 전시회에서 만나는 작가, 큐레이터, 직원 분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공 지식이 없어도 직접 세계 유수의 미술관을 돌아다녔으니 대화 소재는 무궁무진했죠. 특히 베니스 비엔날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항상 인상 깊었습니다. 이번 비엔날레를 보고 왔는지, 어느 국가관이 좋았는지, 이번엔 못 갔는데 저번에 갔을 땐 이 작가가 좋았었는데 등등... 친구는 그런 대화를 끝내고 나면 항상 베니스 비엔날레는 미술계의 올림픽 같은 거야 정도로 설명을 해주더군요.
그러는 동안 제 삶에 미술이라는 것이 꽤 깊게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 제가 알고 있는 예술 관련 아이템을 적용하기도 하고, 제가 기획하여 브랜드와 아트를 엮어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제 담당 업무가 아닌데도 아트 얘기만 나오면 제가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더군요. 당시 일도 정말 좋아했는데 제 취향까지 담을 수 있게 되니 무척이나 즐겁게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와는 SNS 계정을 하나 운영하게 됐습니다. 전시를 본 두 남자가 대화하는 형식의 계정이었는데, 주말마다 하루에 네댓 개 전시를 열성적으로 함께 보러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도 저도 점점 이게 일인지 취미인지 모르겠는 수준에 접어들게 되더군요. 다행히 지금은 서로 본업을 열심히 하고 다음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친구는 요즘 해외 갤러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저는 이제야 조금이나마 즐기는 법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아내와 휴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베니스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비엔날레를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데 베니스가 언제 물에 잠길지 모르니 올해가 좋겠다는 반쯤 농이 담긴의 말을 건넸죠. 아내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고, 그렇게 베니스를 다녀오게 됐습니다. 실제 가보면 뭐가 다를지 무척 궁금했는데, 실제로 다녀오니 어느 정도 달라진 면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예술을 즐기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조급함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게 됐달까요. 손바닥만 쳐다보다 드디어 그 너머의 세상에 초첨을 맞출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 보니 어쩌다 하게 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시계를 좋아하다 스위스 제네바에 다녀오기도 하고, 백패킹에 미쳐 스웨덴 키루나를 걷고 오기도 했죠. 이제 베니스를 다녀왔으니 저 스스로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감히 칭해봅니다. 취미에 욕심을 내게끔 길을 제시해 준 친구 녀석도, 그 길을 함께 걸어주는 아내에게도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예술을 통해 저를 돌아보고,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나눠보고 싶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