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버립니다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 展

by 아보퓨레

1월 1일, 새해를 맞이해 아내와 함께 냉장고 청소를 했습니다. 정확히는 냉동고 청소가 맞겠군요. 얼려뒀다 나중에 먹어야지 하던 것들이 너무 쌓여 포화상태가 된 냉동고. 이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았습니다.


빵순이인 아내의 빵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과감하게 3개월 이상된 녀석들은 이별을 고했죠. 출장 가서 사가지고 온 호두과자, 나들이 가서 사 온 런베뮤의 베이글, 선물로 나눠주고 남은 쿠키들. 아내는 아깝다는 말을 연신 되뇌었습니다. 겨우내 먹을 도토리가 가득 담긴 다람쥐의 볼때기에서 도토리를 한 알 한 알 끄집어내는 심경으로 오래된 빵들을 버렸습니다.


2024년 새 가정을 이루며 가장 많이 버린 것은 옷이었습니다. 오랜 바이어 생활로 인해 옷이 참 많이 쌓여있었습니다. 이사를 오기 전 나름 정리를 한 상태였지만 일 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한 수트가 아직도 열 벌이 넘게 있었고, 직원행사 때 쟁여놓은 옷들도 한아름이었죠.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다른 평범한 집처럼 아내의 옷보다는 적게 만들자. 기회가 될 때마다 옷들을 정리하여 업체에 수거를 맡겼습니다. 10kg, 20kg. 작업을 할 때마다 제가 가진 옷의 무게에 새삼 놀라게 되더군요. 덕분에 옷장의 지분율은 점점 낮아졌습니다. 엊그제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행거가 어느새 내 것이 됐어." 아내가 느낄 정도니 꽤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옷을 구매하는 상황이 오면 버릴 것을 꼭 하나 이상 고민해보고 있습니다. 전과 달리 새로운 옷을 구매하는 것에 대해 보다 긴 기간, 입체적으로 따져가며 의사결정을 하게 되었죠. 비우는 습관 덕분에 채우는 방식도 한 차원 성장한 것입니다.


니콜라스 파티, <폭포(Waterfall)>, 2024 ⓒ 아보퓨레


이런 저와는 달리 비움의 미학을 고차원적 수준에서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스위스의 작가 니콜라스 파티입니다.


지난 토요일, 호암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니콜라스 파티의 전시 '더스트(Dust)'를 보기 위해서였죠. 전시 해설을 듣던 중 도슨트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니콜라스는 이번 전시를 위해 5개의 대형 벽화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들은 전시가 종료되면 폐기될 예정이에요."


없어질 벽화의 퀄리티와 스케일이 대단했기에 의아했습니다. 이것들을 다 버린다고? 특히 호암 미술관을 들어서면 보이는 붉은 폭포작품은 벽면에 그려진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별도의 플레이트 위에 작업한 것으로 충분히 이동이 가능해 보였기에 아깝다는 각이 들었습니다.


도슨트를 해주신 해설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작가의 의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힌트는 전시 타이틀에 있었습니다. 전시명인 '더스트(dust)'는 니콜라스 파티의 재료와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작업 중 삼분의 일 이상이 먼지처럼 날아가는 파스텔 작업의 특성, 그런 재료로 그린 그림과 그림이 표현하는 것의 유한함. 한 없이 작고 가벼운 먼지는 재료가 될 수도 있고, 우리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죠.


유화작업은 한층 한층 물감을 말려가며 작업을 해야 하는 특성상 긴 작업기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 작업을 붙잡고 있으면, 인간이라면 당연히 작품에 불필요한 욕심과 집착이 들어가지 않을까요. 니콜라스는 어린 시절에는 그라피티 작업을, 이후 학부에서는 유화작업을 공부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유화보다는 빠르게 작업하고 그리고 홀연히 사라지는 그라피티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작업철학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재료만 파스텔로 바꾼 것이죠.


니콜라스는 이번 전시를 위해 5주 동안 다섯 개의 벽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먼지처럼 사라질 예정이죠. 그는 다섯 개의 작품을 비워내지만, 오히려 이 비움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더욱 다채롭게 채워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냉동고 정리를 마친 후 아내는 온라인으로 호빵을 주문했습니다. 빵을 넣는 칸이 아주 많이 비었다며 어떤 새로운 빵들을 채워 넣을지 고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전에 냉동고가 꽉 차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정말로 채우려면 비워야 하는 것이 맞나 봅니다.


올해도 많은 것들을 비워내야겠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필요한 번뇌와 욕심을 버리고, 삶의 본질과 개인의 목표를 채워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오늘도 비웁니다. 나는 오늘도 버립니다.


-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
- 2024.08.31-2025.01.19
- 화-일 10:00-18:00(매일 2시, 4시 도슨트)
- 호암미술관(경기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562번길 38)
- 성인 14,000원(온라인 예매 필요)
니콜라스 파티, <구름(Clouds)>, 2024 / 니콜라스 파티, <부엉이가 있는 초상(Portrait with Owls), 2021 ⓒ 아보퓨레
니콜라스 파티, <산(Mountains)>, 2024 / <금동 용두보당>, 고려 10-11세기 ⓒ 아보퓨레
니콜라스 파티, <동굴(Cave)>, 2024 / <백자 태호(Placenta Jar), 조선시대 ⓒ 아보퓨레


니콜라스 파티, <나무 기둥(Tree Trunks)>, 2024 / 니콜라스 파티, <버섯이 있는 초상(Portrait with Mushrooms), 2019 ⓒ 아보퓨레
니콜라스 파티, <폭포(Waterfall)>, 2024 ⓒ 아보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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