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폰 헬러만, 축제 展
나에게는 자주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이 둘 있다. 달에 한 번은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며 회사일이나 결혼생활, 그리고 미혼친구의 연애사를 나누는 관계로 누가 봐도 일반적인 친한 친구 사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어릴 적이야 수능이라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기에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나눴지만, 대학에 진학하며 각자 다른 전공을 공부하며 자신만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달라져갔다.
지방에서 공부해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함께 했던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서울을 떠났다. 나는 첫 직장에서의 발령으로 천안을, 다른 친구는 목포로 발령을 받았으며, 나머지 한 친구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광주 소재의 로스쿨에 입학했다. 삼 년 채 걸리지 않아 내가 먼저 서울로 복귀했고, 목표로 갔던 친구는 이직을 강행하며 서울로 돌아왔다. 로스쿨에 진학했던 친구는 변호사가 되어 서울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알렸다.
다시 서울에서 뭉치기까지 대략 팔구 년이 걸렸다. 그 사이사이 둘이던, 셋이던 얼굴을 봐 왔지만, 그래도 전처럼 자주 볼 수 있는 셋이 되니 희미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당혹스럽게도 이 세 명의 머스마는 남자들이 흔히 즐겨하는 게임, 당구, 골프를 즐기지 않았기에, 그저 얌전히 소주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변호사가 된 친구가 말을 시작했다. "저번에 네가 추천해 준 전시 너무 재밌게 보고 왔어."
나는 그를 의심했다.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주말에 볼만한 전시를 추천해 달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나름의 고민 끝에 질문자가 흥미를 느낄법한 전시를 제안해 주지만 실제 관람으로 이어지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나도 어느 순간 무뎌져 이슈가 되고 있는 전시 한두 개를 추천해 주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게 된 지 오래였다.
내 의심과는 별개로 그는 말을 이어갔다. 법 공부를 하며 답답함을 느낄 때. 고시부터 로스쿨까지 돌아 돌아 외로이 공부를 이어가고 있을 때, 전시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돌볼 수 있어 정말 좋았다고. 앞으로도 좋은 전시들을 많이 추천해 주면 고맙겠다고 그는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친구도 한마디를 얹었다. 자신은 목표와 울산에서 일을 하며 서울 생활을 정말 그리워했다고 했다. 그래서 가끔 서울로 놀러 올 일이 있을 때면 꼭 미술 전시 한두 개를 보고 내려가는 것이 자신을 안주하지 않게 만들었고 그래서 더 좋은 곳으로 이직까지 할 수 있었다고.
갑작스러운 두 남자의 고백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있었지만, 덕분에 우리는 아마추어로서 미술을 즐기는 것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후 우리의 만남은 밤이 아닌 낮으로 바뀌었다. 술약속을 해도 전시 하나 보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프로그램이 추가됐다.
5월의 끝자락에 나는 두 친구를 마곡으로 불러냈다. 조금 멀지 않냐는 반응이 나올 법도 했지만, 나의 큐레이팅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그들이었기에 자신 있게 발산역에서 내리라고 일러줬다. 이번 목적지는 스페이스K였다. 두 친구 모두 가본 적 없는 공간이었고, 쉽고 재밌는 전시가 열릴 때 함께 가리라 마음먹었던 곳이었다.
전시는 독일의 작가 소피 폰 헬러만의 '축제'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한국적인 작품으로만 작업을 수행한 것도 큰 매력이지만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운 벽화가 백미인 전시다. 큰 감탄사가 나올 것을 확신했고, 역시 확신은 사실이 되었다.
우리는 전시관람을 마치고 망고빙수를 먹으며 후기를 나눴다. 변호사 친구는 니콜라스 파티의 전시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때도 전시를 위한 벽화가 폐기되는 것이 아쉬웠는데, 소피의 전시는 그 규모가 엄청나 할 말을 잃을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친구는 작품에는 사람이 가득한데, 벽화에는 사람이 없는 구성이 신선했다고 평했다.
빙수의 망고가 사라져 갈 때쯤 주제는 어느샌가 미혼 친구의 연애 이야기로 넘아가 있었다. 결국 남자 셋이 만나서 하는 이야기 노는 방법은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예술이 있어 우리가 할 이야기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겠지.
오래된 친구들과 만나서 뭘 할지 고민되는 분들에게 나는 꼭 전시를 보시라 추천해주고 싶다. 술약속이 6시라면 5시에 만나 갤러리만 잠시 들렀다가 술자리를 가셔도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신기하게 대화가 더 풍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전시명 : 소피 폰 헬러만, 축제
기간 : 2025.4.9-2025.7.6
장소 : 스페이스K
관람시간 : 10시-18시(월 휴무)
티켓 : 유료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