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토남, 테겐녀를 아시나요?

한국 현대미술 하이라이트 展

by 아보퓨레

K는 이제 막 망원역 2번 출구를 빠져나왔다. 태양마저 타버릴, 그래서 소멸해 버리면 어쩌나 싶은 더위였다. 다급하게 가방에 있던 검정 우산을 꺼내 펼쳤지만 우산이 그려내는 그늘 사이로 군대군데 햇살이 스며 나왔다. 누가 뒷목을 향해 돋보기를 대고 있나... 마치 35km를 지난 마라톤 주자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신발 밑창이 녹아 지면에 달라붙은 건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다. 250m, 땀이 온몸을 적시기 직전에야 이름이 헛헛한 맥주집에 도착했다.


친구들은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무슨 말이 중요하랴. 시원한, 아니 차가운 맥주 하나요. 키가 큰 청년은 맥주탭에서 맥주를 받기 시작했다. 맥주 한 컵 따르는 시간이 억겁인가 싶다. 술 한 잔을 이토록 간절하게 기다렸던 적이 언제였더라. 그가 맥주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잔을 낚아채 감사인사를 건넨다. "감사흐므드..." 벌컥, 벌컥.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클라우드? 어쩐지 맛있더라. 그래, 무슨 얘기 중이었는데? 아, 서로 테토냐 에겐이냐 묻고 있었다고? 나는 참 유행이 돌고 도는 것 같애. 우리 어릴 적엔 혈액형 묻곤 했잖아. 그땐 몇 개 안 됐었어. A형, B형, O형, AB형. 또 있나? 그런데 이게 MBTI로 바뀌면서 상당히 복잡해졌어. 16개지? 나랑 주변 친구 거는 알아서 파악이 되는데 주변에 없는 건 아직도 잘 모르겠더라. 예를 들면 INTJ 같은 거. 근데 이게 또 에겐, 테토로 오면서 쉬워졌어. 남성성 테스토스테론, 여성성 에스트로겐, 그리고 남, 녀. 이 곱하기 이는 사. 어떻게 어린 친구들이 다시 네 개 안에서 놀 수 있지 진짜 신기하다니까.


뭐? 그새 에겐, 테토가 세분화 됐다고? 테겐, 에토? 이건 또 뭔데. 아... 원래 성향은 에스트로겐인데 사회적 모습은 테스토스테론이면 테겐, 그 반대는 에토라고. 아, 벌써 여덟 가지로 늘어났네. 이렇게 따지다 보면 남녀 구분도 더 나눠지겠네. 요즘은 또 그렇잖아. 젠더 플루이디티(Gender Fluidity). 근데 핵심은 그건 거 같애. 테겐, 에토도 더 나눠질 거야. 결국 MBTI보다 복잡해질걸? 서른두 가지는 돼야 젊은 친구들이 만족해할 거라고.


박현기, <무제>, 1979 ⓒ 아보퓨레


구세대에서는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자신의 모습이 두 개 정도면 됐어. 직장으로 대변되는 사회생활에서의 나, 그리고 그 외의 삶에서의 나. 두 개면 심플하게 웬만한 건 다 해결 됐지. 내가 돌이면 돌의 삶을 살다가 돈 벌어야 되니 잠깐 나무처럼 행동하는 부분이 있는 거지. 돌과 돌 사이에 나무 하나 딱 잘 끼워놓으면 되는 거야. 그마저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근데 요즘은 어때. 돈도 벌어야 하는 거 외에도 유튜브니 틱톡이니 또 다른 캐릭터를 좋아서 만들잖아. 아마 한 친구가 5개쯤 전혀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을 걸? 인스타그램으로 한번 볼까. 개인 일상계정, 갓생계정, 뜨개질 계정, 반려견계정, 뭐 이렇게 말이야.


나라는 사람이 돌 세 개쯤 쌓아진 모습이라고 해보자. 상황마다 가장 윗돌과 가운데 돌을 빼고 나무, 철, 다이아몬드 중 필요한 걸 올리고 다시 윗돌을 쌓는 과정을 해야 한다고 쳐. 너무 번거롭지? 그래도 연기를 시작하고 끝낸다는 것은 일종의 세레머니가 필요한 거긴 해. 퇴근 후 회사를 빠져나오자마자 넥타이부터 풀어헤쳐버리는 그런 거 있잖아. 근데 이마저도 효율, 효율 하다 보니 그냥 돌 사이에 TV 모니터를 떡하니 껴 넣어버리는 선택들을 하더라고. 리모컨으로 상황에 맞게 나무든 뭐든 영상을 틀어 놓으면 간편한 건, 뭐, 인정해야겠지.


이러다 보면 결국 나를 지탱하는 코어가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수 있어. 잊고 잃어버린 거지.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내가 나무인지 모르고 불을 확 붙여버리면 큰 일 나버릴 수도 있잖아. 불나방이 되는 거라고. 나 자신을 모른 채로 눈에 보이는 매력적인걸 좇게 될 거야. 그런데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코어에 모니터를 꽂아 놨더라. 나무 사이에도 모니터, 철 사이에도 모니터, 다이아몬드 사이에도 모니터. 그치 이미 발생한 걸 되돌릴 순 없지.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코어를 다시 찾을 수 있냐고? 쉽진 않은데 방법은 있어. 모니터 전원을 꺼버리는 거지. 그럼 거기에 적어도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겠어?


ⓒ 아보퓨레
· 한국 현대미술 하이라이트 展
· 25.5.1.-26.5.3
·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
· 10시-18시(수/토 10시-21시)
·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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