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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박스를 모았던 이유

왜죠?

by Noname

어렸을때 부모님은 여력이 없으셨던건지, 나를 믿으셨던건지

알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방학일기를 밀려도, 그저 달력에 그날그날 진짜 날씨를 기록해 두셨을뿐

(나의 정직함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나보다...어쩌면 한번 일기를 밀렸다가 날씨를 꾸며낼 수 없어서 엄마가 그렇게 대응한지도....)


뭘 하라고 재촉하거나, 했느냐고 확인하신 적이 없었다.


때가 되면 했고, 필요한게 있으면 알아서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빈상자가 준비물인걸 잊어버리고 있다가 전날 밤 엄마에게 말했었다.


엄마는 화를 냈다.

바로 전날 화장품 상자들을 버렸는데, 내게 챙겨줄 상자가 한개도 남아있지 않아서 속상하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적잖히 충격을 받았다.


그뒤로 상자를 모으는 버릇이 생겼다.

이건 이상하게도 성인이 되어서도 그러한데,

아끼는 물건의 상자는 이사를 갈 수 있으니 남겨두는거다.


그런데, 20대 후반까지도 온갖 상자나 미술 만들기 재료가 될만한 모든걸 모아두는 버릇이 있었다는 거다.


물론 지금도 몇몇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땐 좀 심했던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나의 세상에서는

미리 준비하고, 미리 체크하고, 아니 사실 그러지 못해서 구글캘린더에 꼭 적어둔다.


그런데 여기서 함정은 적어두지 않은건 새까맣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어떤 납기나 준비사항들에는 꽤나 철저하게 반응하는 편인데,

예전 회사에서 기술사스터디를 진행할때도 그렇고, 품질업무를 할때도 그렇고

어쩐지 일정에 맞춰 버퍼를 두고 요청한 일정과 과업들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된다.


소위 시쳇말로 "쪼아야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오늘은 더욱 충격이었다.

굉장히 성실하고, 일에 있어 출중하신 분인데

두번째 누락이 발생했다.


"다들 그냥 알아서 하는거 아닌가요? 납기를 정해주고 세번이나 메일을 보냈는데 왜 안하셨지... "

"쪼아야 돼요. 정말 그렇게 알아서 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대한민국이 이렇진 않았겠죠."


너무 바빠서 그러셨을거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 그럴수있구나 싶었다.


신기한 일이다.


보통은 자신이 해야할 일은 스스로 챙겨서 하는게 아니었다니.

게다가 타인과 관계된 일들, 기한이 정해진 일들에 대해서 대체로 '쪼아야'진행이 된다니


생각보다 세상은 느슨하구나.


나야말로 이상했구나.


실수하거나, 일을 잘못하거나, 뭔가를 놓치면 어쩐지 엄청난 수치심과 공포에 사로잡혔는데.


그럴수있는거구나. 마음이 어쩐지 편해지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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