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시전 된 것인가
그동안 동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걸 절실히 깨닫고 있다.
30대 이전, 그 동화 속 세상의 나를 바라보며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내 꿈은 높았고, 현실에서의 문제들은 30대 이후에나 발현이 되었다.
30대 이후의 문제들은 생각보다 심각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물질적인 것들, 현실적인 부분에 골몰할 이유가 없는 정도였다.
이 정도의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당면한 건 인생을 살면서 어쩌면 처음인 것 같다.
드디어 내게도 현실에 발을 붙이고, 실리적 물욕을 탐할 기회를 주시는 것인가.
물론 30대 중반에 직장도 없는 상태(프리랜서였으니), 목과 허리디스크로 산 송장으로 보내던 시절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물론 그전에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와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매우 힘들었고, 가족의 병환으로 몇차례의 고비를 지나와야 했다.
나를 보고 동화 속에서 살았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굴곡이 심한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전적인 문제가 이토록 가혹하게 발생했던 적은 없다.
20대에 쏘우라는 영화를 보고 감명받았던 탓인지, 이 문제를 발생시킨 요인이 나 자신이라는 것도 참으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나는 나를 정말 죽이고 싶었다.
지금 돌아보니, 이건 내게 너무나도 필요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어떻게 해야 돈을 벌지?'라는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혀 와닿지 않았다.
그저 평탄하게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이 나를 이 아름다운 세게에 머물 수 있게 가족들이 얼마나 큰 지원을 해줬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명확하게 시야가 트이고 바로 보였다.
복에 겨웠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 알 것 같다.
내가 너무도 당연히 생각한 것들
당연히 이 정도 능력은 있어야 하고, 당연히 보통 수준 이상의 충분한 돈을 벌고
당연히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고, 당연히 사람들은 나를 지지해 주며
당연히 부당한 것에 내가 반론을 펼치면 당연히 내 말이 맞고 내가 의도한 바대로 진행이 된다.
이 모든 비합리적 신념.
내가 가진 부정적 비합리적 신념에 대해서는 익히 탐구한 적이 있지만
내가 가진 이 긍정적 비합리적 신념들에 대해서는 가끔 감사했지만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던 듯하다.
내면의 쏘우가 말했다.
너는 네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너는 네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하찮아했으며
너는 네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했지만 너 자신을 하찮게 취급했지.
네가 버는 돈과 가진 것들을 하잖게 여겨 함부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마흔에는 꼭 죽겠다는 다짐을 38년을 해왔으니
(그 다짐은 일기를 쓰면서 사라졌음에도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이런 심판을 받을 만하지 않을까.
기욤뮈소의 소설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 주인공이 살고 싶다고 느꼈을땐
이미 자신이 과거에 고용한 청부살인업자에게 죽지 않던가.
이 고비가 지나가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나를 소중히 최우선으로 아끼고 사랑할 것이고,
생이 허락하는 한 무병장수하며 우아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할 것이고,
내 능력을 인정하고, 내가 수확한 그 모든 것들에 들어간 나의 노고를 칭송할 것이며,
내가 번 돈은 단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는 사람이 될 것 같다.
"고통을 가장한 축복"
그리고, 나는 내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줄 것이다.
그럼 이제 발목을 고통스럽지 않게 깔끔하게 자를 방법이 있나 방법을 좀 찾아봐야겠다.
(영화 쏘우 1편에서는 발목을 잘라야만 그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