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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802 상담4회기 : 앞머리

깜찍하다고 합니다.

by Noname

상담4회기, 가기 전부터 단전으로부터 뭔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퇴근 후, 여느때와 같이 서점으로 가서 윌라로 듣고 있는 책의 내용 중 활자로 보고 싶었던 부분을 찾아보는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샬롯 브론테 작가님의 '제인 에어' 1권을 끝내고 2권에 접어들었다.


활자로 보고 싶은 구절이 많았는데, 리드가에서 제인이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기술한 부분만 몇번을 읽었다.

리드가 사람들이 이토록 이질적인 자신에게 애정을 줄 의무는 없으며, 자신은 그들에게 쓸모없는 존재일뿐이라고 말하는 구절이다.


이질적인 존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


그 구절을 마음에 담고, 두려움을 느끼며 상담을 받으러 갔다.


선생님께서는 바뀐 나의 머리카락과 옷을 칭찬해주셨다.


중간보고가 있는 날이라 검은색에 흰색 줄무늬가 있는 바지정장 차림이었고,

내 머리카락은 사흘전, 앞머리를 잘랐다.

요즘 부쩍 머리숱이 줄어든것 같아 고민이라고 회사분에게 이야기를 하니 머리카락을 계속 묶고 다니면 견인성 탈모가 올 수 있다고 알려주셔서 머리카락을 푸르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앞머리를 자르며 초등학생 시절 처음 멋을 부리기 시작한 때가 생각났다.

그당시의 여자아이들은 자신을 꾸미고자 하는 마음을 최초로 표현하는게 스스로 앞머리 자르기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미용실에 갈 법도 한데, 나는 스스로 앞머리를 잘랐다.

사실 이런 일은 자주 있다. 미용실에 가는 시간과 스타일링을 받는 시간을 생각하면 스스로 앞머리를 자르는 편이 훨씬 간단했다.


앞머리를 자른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추워진 날씨와 훤하게 넘기고 다니던 이마에 뭔가가 자꾸 나기 시작해서 보온성과 심미성을 위한 취지였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다니면 앞머리가 없을 경우, 종종 머리카락이 애매하게 얼굴을 덮어버리기도 한다.


일전에 세네갈에 있을 때나 기술사 공부를 할 때에는 혼자서 단발로 잘라버린 적도 있기에 37살의 나는 앞머리를 제법 잘 잘랐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어딜가나 듣는 이야기지만 빠른 적응력과 친화력 덕분에 이직한지 3개월쯤되면 다들 3년은 된 사람처럼 생각한다. 나 역시 3개월 밖에 되지 않은걸 늘 놀라워하기도 하고, 3개월 이후로는 그곳에 늘 있던 사람처럼 혹은 터줏대감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전 직장부터는 맡은 직무와 사람들 간의 어떤 알 수 없는 견제로 인해 결코 만만해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부터 앞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되도록 까칠한 인상을 풍기고 다녔다.


이전 직장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몇번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피하는 경우가 많아져 지인에게 여쭤본 결과, 내 눈빛은 닿는 순간 베이일 것 같은 날카로움이 타인을 얼어묻게 만든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한 후, 어느날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눈과 마주치고는 나조차 흠칫 놀랐었다.


원래 나는 100번을 잘해주고, 어쩌다 한 번에 실망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 일이 십수년 넘게 쌓이면 나도 사람인지라 그냥 100번 못하고 한번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글쎄, 내 인격이 수준이 드러나는 부분이지만 난 천성이 착한 사람이 아니니까


새로 옮긴 직장에서 좋은 분들의 정중함과 배려와 다정함에 마음을 열었나보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협력사 분들께서도 처음에는 내외하셨지만 여러모로 일을 진행해보시다가 점점 방어적인 태세를 풀어주신 덕도 있다.


날카로운 태도는 양날의 검처럼 내 자신까지 아프게 한다.

내가 아프지 않고 잘 살려면 본래의 나인 상태로 살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심적으로 힘들었었는지도 모른다.


동성인 지인이 많고, 그들로부터 애정을 듬뿍 받는 나는 '깜찍한 미소'로 웃어주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었다.


"깜찍한 미소"


아, 나는 그렇게 딱딱하고 날카로운 태세를 유지해봤자 내 자신에게 좋을게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와서도 마음씨 여리고, 장난치기 좋아하고, 밝은 면을 다 들켜버렸고 어차피 나이도 다 아는데 각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앞머리를 잘랐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을 찾아가고, 좋아하는 일들을 적당히 하게 된 것을 매우 좋은 징조라고 하셨다.


바이오리듬처럼 언제 또 마음이 가라앉을지 모르지만

누구나 우울한 날은 있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내 안에 갇힐 수록 '쓸모없는 존재'라는 구덩이에 빠졌던 것 같다.

그렇게 사람들을 오해하고, 오만에 빠져서 '모두 나가주세요. 혼자있고 싶어요'라며 '나는 정말 고독하다'라고 느끼는 지도 모른다.


MBTI를 여쭤보시며 내게 T와 F의 성향이 모두 있는 것 같은데

어릴 때부터 시를 쓰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에 세심하게 신경쓰고, 거절을 하고도 마음을 씨는 것이 본래 공감을 잘하고, 따뜻한 분일 거라고 하셨다.


아, 좀 그런것 같네요.

어딜가든 사람들을 챙겨서 제3자의 입장에 계신 분들이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이 지치지 않냐고 여쭤보신 적이 여러번 있었다.


다만 그때는 사랑받고 싶은 욕심에 힘듦따위는 잊었던건지, 그만큼 에너지가 넘쳤던 건지 모르겠지만

작년 부터는 그런 여유가 없어졌다.


어쩌면 내 인생의 2막을 준비하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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