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혹은 애증
삼남매 중 첫째인 나의 엄마에 대한 짝사랑은 작년 봄 끝이 났다.
초등학교 3-4학년이었을 즈음,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빵집이 있는 읍내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매년 엄마의 생신이되면 용돈을 모아 친구들을 따라 버스를 타고 나갔다.
엄마의 선물을 산다는 핑계 반, 작은 슈퍼와 담뱃가게가 전부인 작은 마을을 떠나 그 당시 나에게 매우 큰 세계처럼 느껴졌던 읍내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 반이었을거다.
용돈을 모아서 엄마의 생신 케이크를 사고, 장미꽃을 샀다.
장미꽃은 학년이 올라갈때마다 그 갯수가 늘어서 언젠가는 100송이의 장미를 사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랐다.
어린 아이의 부모님에 대한 사랑.
갓 태어난 동생들에게 집중된 사랑이 나에게도 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태어나 나에게 젖을 물리고, 온갖 고생을 다해준 고마움,
그리고 단지 부모님이기에 느끼는 지고지순한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건,
어버이날 외에 그 날이 거의 전부였다.
그 당시에는 지금은 곧잘 말하는 '사랑해'라는 표현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말에서는 나는 그저 엄마의 삶을 망가뜨린 이기적이고, 못된 아이였을 뿐이었기에
감히 살갑게 엄마에게 안기며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따윈 없었다. 어린시절엔 분명 그랬다.
엄마의 표현대로 다른 집 아이들보다 유별나고, 알 수 없는 아이일 뿐인 나는 나의 꿈이 무엇이었건 결국에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크게 속 썩이지 않고, 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그런 아이가 되어야했으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대학생이 되고, 내 용돈을 스스로 벌 수 있을 때쯤부터 무던히 연습을 해서 할 수 있게 된 말이었다.
다가오는 수요일은 엄마 생신이다.
자식된 도리로 생신 케이크를 사서 동생과 당일치기로 시골에 다녀왔다.
물론 작년 어느날까진 매일 아침 엄마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묻고, 사랑한다는 말도 잊지 않고 해드렸었다.
그것이 그저 지독한 짝사랑이었다는 걸 깨달은 후로, 그러니까 정확히 엄마가 기다리는 전화는 나의 전화가 아니라 아들래미의 전화뿐이라는 걸 깨달은 후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글쎄,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있겠냐는 말을 하지만
엄연히 열손가락 깨물어 덜 아픈 손가락은 분명히 존재했다.
출발하기 전, 화장을 하는 동생에게 시골 가는데 뭐하러 화장을 하냐고 묻다가
"아, 엄마도 남이지"하고 둘이 실컫 웃었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는 우리에게 남동생이 술을 마시고 온날 둘이 한판했다며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그럼에도 당신 아드님이기에 엄마는 아들이하는 가게에 도움이 되려고, 미리부터 시골집 채마밭에 파를 심고, 상추를 심어 비싼 채소 가격이라도 줄여주고 있으시다고.
"엄마, 우린 삼각관계였어. 나는 엄마를 짝사랑했고, 엄마는 남동생을 짝사랑했지. 근데 나의 짝사랑은 끝났어."
우리는 또 한바탕 웃었다.
내가 엄마에게 생일 선물을 사드리지 않게 된 건 꽤 오래 되었다.
엄마는 내가 드리는 선물을 늘 탐탁치 않게 여겼고, 내가 사드리는 거의 대부분의 음식을 마뜩찮아하셨다.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정도가 동생들과는 달랐다.
동생들이 주는 아주 작은 선물 혹은 단돈 십만원은 내가 드린 백만원의 용돈보다 무지막지하게 크고, 귀한 선물이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애정과 따뜻한 말 한마디를 바랐다.
이제는 그 애정과 관심이 세상 그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이라는 걸 안다.
그건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와야 하는 거고, 자신 역시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꽤나 깊어야 발현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하고, 귀한 것'이니까. 너무 큰 걸 바라지 않게 되었다.
물론 나는 자식에 대한 엄마의 깊은 모성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그녀가 사람 대 사람으로서, 관계하는 존재로서 나를 대하는 모습과 마음 씀씀이를 추측할 뿐이다.
어쩌면 훗날 엄마의 사랑이 그저 표현되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해도,
그리하여 내가 엄마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했던, 고등학생 시절 3년과 대학생 1년,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1년, 그리고 작년 부터의 이 냉담함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해도,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저 달게 그 마음의 아픔을 견뎌낼 것을 늘 다짐하고, 다짐한다.
완벽한 부모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있듯, 완벽한 자식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있게 마련이니까
아마 내가 끝낸 그 짝사랑은 어린시절 엄마에게 거부당했던 어떤 날들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애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집착이었을테고, 그런 집착을 견뎌내기가 그녀 나름대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건, 상대방이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짝사랑은 끝나고, 그저 바라는 거라곤 엄마의 삶이 더이상 고되지 않고.
행복하길 바라는 순수한 애정이 남아있다.
이 생에서 가족으로 만나 서로 너무나도 다름에도 불구하고,
핏줄이라는 명목 하에 끈끈하게 이어진 이 관계에 감사한다.
떠나오는 길에 엄마를 안고, 말했다.
"엄마 태어나시느라 고생하셨슈. 사랑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