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모드 해제를 위한 인지능력 저하
"상아회원님, 괜찮으세요? 운동을 해도 되는건가요? 하시는 트레이너 선생님 말씀에
"아, 저 약기운 빼야돼요. 정신차리려면 운동이라도 해야죠!"
하고 베시시 웃었다.
2022년 12월 19일 심리상담 선생님께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진료 기록이 필요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조언을 해주셔서 정신과상담을 받고, 그날부터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기술사 면접을 준비하면서 인데놀을 먹어본 결과, 당시 사람들의 말이 귀를 스쳐지나가고 전혀 문맥이해도 되지 않고, 머리가 그저 멍한 상태가 됐던게 생각이 났었기에 약을 복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단 하루만에 부작용으로 인해 머리가 아팠고, 속이 좋지 않았다. 뭘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상담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해놓고도 어떤 판단이나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라서 약으로 인해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렸다. 선생님은 전화통화에서 '약은 중요하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한참을 설명을 하셨다.
내키지 않았지만 약을 복용하기로 했다.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차분해졌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현재만을 볼 수 있었기에 어쩌면 차분하고 안정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싶었다.
한편으로는 타고난 기질이 감정기복이 있고, 달거리 전에는 이상하게도 일주일전부터 으레 생리전 우울증을 겪는 여자분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사소한 것에도 예민해졌기에 괜찮지 않을까도 싶었다.
어느 정도 조울증이라는게 내게 있다는 걸 알고있었기 때문에 이참에 고쳐보자 싶었다.
지금 생각으론 사람의 감정이 108가지나 된다는데 당연한게 아닌가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약처방을 다시 받고, 속이 좋지 않은 부분은 많이 해결이 되었다.
단지 먹을 수 있는 양이 급격하게 줄었고, 그덕분에 10년전 몸무게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문제는 인지능력이 급격히 떨어져있다는거다.
"이거 정신과약 괜찮다고 하면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는 음모가 아닐까요?저 지금 완전 동네 바보 언니잖아요. 콧물까지 나오면 큰일인데!!"
대리님께 농담을 던졌다.
즐겨보던 '정신의학신문' 기고글과 인스타그램의 정신과 선생님의 인스타툰을 보고 약을 복용하는 동안 인지능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상태가 호전되고 나면 대체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여 그냥 복용 중이다.
약 복용으로 인해 첫주는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기 힘든 상황이라 휴가를 받았다.
인사팀에서는 처음부터 휴가를 내라고 권유했지만 현재 진행중인 프로젝트에서 나와야할 수도 있어서 고사를 했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프로젝트PM님과 팀장님께 말씀을 드리고, 3주간만 쉬겠다고 했고, 감리가 코앞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쉬다 돌아오시라고 해주신 덕에 마음 편하게 3주를 쉬었다.
쉬는 동안 친구들을 만났고, 몇년만에 친구를 만난 순간 외에는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들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11일 간 14시간 동안 잠을 자고, 운동하고, 다시 자는 생활을 했다.
약에 많이 적응이 되었고, 회사에 복귀를 했다. 다시 약을 처방받으면서 선생님께서 위약을 빼고 먹어보라하시기에 월요일 저녁에 빼놓고 먹었다가 화요일 아침 눈뜨자마자 구토를 했다.
오전에 본사에 인사를 가기로 했었는데, 사장을 말씀드리고 오후에 가서는
“출근하기 싫었나봐요.” 하고 또 웃었다.
지난 일주일간 인지능력이 저하된 탓에 늘상 업무상에서 다루던 툴을 다루는 방법이나 절차 등을 중간중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니 그냥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되었다.
가령 오늘은 자동차 앞유리를 닦기 위해 와이퍼를 움직이면서 워셔액 분사를 하는 방법이 전혀 기억나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컴퓨터를 켜야하는데 전원버튼을 눌러야한다는 걸 모르게 된 상태.
일상에서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들은 종종 의식하는 순간, 갑자기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뭔가를 작동 시키고, 사람의 말을 이해하거나, 시의적절한 질문이나 필요한 것을 의식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런데 또 신기하게 감은 살아있어서 직관적으로 뭐가 없겠구나 이런 건 되는거다.
심지어 오늘은 지난 14개월 동안 PT를 받아오면서 처음으로 지각을 했다.
"선생님 늦잠자서 5분 늦을거 같아요." 하면서 죄송하다는 말도 안한... ㅋㅋㅋ
그런데 또 웃긴게 PT시각은 10시였고, 9시 40분에 갑자기 전날 헬스장에서 들었던 음악이 꿈속에서 들리면서 벌떡 일어난 거다. 그러니까 감은 살아있다.
운동복 상의도 거꾸로 입고가고, 주말에는 운동가방을 들고 운동을 가는데 회사에 가져가는 가방을 그대로 메고 갔더니 선생님께서 처음 보시는 가방이라며 신기해하셔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또 한바탕 웃었다.
(회사에 들고가는 가방에는 늘 운동화와 스트랩 같은 것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구운계란, 프로틴 같은 것들 보안 검색대를 매일 두번씩 통과하기에 그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선생님 오늘은 늦잠자서 약을 못 먹고 와서 텐션이 넘치죠?ㅋㅋ"
아 이렇게 좀 뺀질뺀질하게 멍한 상태로 삶을 살면 어떨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진짜 단순하게
그런데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 슬픔과 기쁨과 기타 감정들의 크기가 매우 작다. 역치가 높아졌다고 봐야하나
분명 전같으면 하이텐션으로 모두를 웃게하고, 기쁘면 신이 나서 방방 뛰어다니고, 슬프면 혼자서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는데... 뭐가 되게 무채색의 농도가 짙어진 느낌
낮에 잠시 공부를 하고, 브런치를 살펴보니 지난 3주간 같은 내용의 글을 몇번이나 쓴건지
정신과 선생님께서 보통은 6개월에서 1년간 장기복용을 하지만 그러지 않으셔도 될것 같다고 하셨었는데.
2시간 동안 운동을 하고 기분좋게 집에 와서 약을 먹고, 동생과 같이 3시간 만에 다시 운동을 하고, 한증막에 다녀왔더니 머리는 좀 아프지만 꽤나 텐션이 좋은 상태다.
한의학 맹신론자로써.. 머리에 침이나 잔뜩 맞고 싶지만 한달이나 먹은거 더 먹어봐야지.
작년 사건 때 상담선생님께서 뇌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생존모드로 바뀌기도 한다고 하셨다.
위험한 상황을 좀더 빨리 인지하기 위해서 호르몬의 분비같은 것들이 더 기민하게 된다고할까.
어쩌면 그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나의 뇌는 늘 '진돗개 발령'상태였을지도.
안전모드를 풀어야 컴퓨터의 모든 기능을 다 쓸 수 있듯이,
이번 기회에 생존모드를 벗어나보자.
매슬로우의 욕구위계론의 가장 하위 단계인 생존의 욕구가 지나치게 과잉되어있다면 호르몬 조절로 정상상태로 돌아오면, 제동을 받던 나의 상위단계 욕구들이 자유롭게 풀려나고 더 잘 될 수 밖에 없을테니.
인내!
사제님 인내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