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만 그려서
2014년 12월 내 생일날 나는 내게 선물을 줄겸, 소모임 어플을 깔고, 그림 모임에 가입했다.
당시 모임 대문 사진이 아차산정산에서 펜화를 그린 사진이었기에 내가 좋아하는 그림과 산행을 같이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컸다.
개설된지 한달도 채 되지 않은 모임에는 약 14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대체로 모임은 술을 마시다가 연애를 하는 식의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단톡방에 가입하여 모임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주 잠시 이들이 매번 술을 새벽까지 마시기에 모임을 탈퇴할까 했던 적도 있지만, 모임이 우리집과 가까운 건대에서 있는 것을 고려해서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다른 모임들은 강남이나 홍대에서 열렸기 때문에 거리상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달간 이들을 살펴본 결과, 첫 모임에서 남자 모임장과 남자 회원 둘이 만나 영화를 보고는 그리는게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 그림을 그리고, 술을 마시곤 했다. 개중엔 커플이 동시에 가입한 경우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임장이 그런것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모임을 잘 이끌기에 2015년 1월 1일 신년 모임에 참가했다.
그림만 그리도 도망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당시엔 사람이 많은 것은 크게 개의치 않았었고, 모임에서 제일 시끄러운 사람은 나 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 이전까지는 늘 미술 시간에 A+을 받았고, 어릴 때부터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다가, 새로 오신 미술선생님의 혹독한 점수 D-에 충격을 받은 후로는 수치심과 누군가의 판단이 두려워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상태였긴하다.
(그럼에도 조용히 혼자 미술학원을 갔던 적도 있다. 선 연습을 3시간 동안 주3회 서서 시키는 바람에 코피를 쏟고 그만 두었지만)
눈썹이 ㅅ자로 쳐져있는 모임장은 정말 '뭐 저런 친구가 다 있지?'싶을 정도로 정말 마음씨가 좋았다.
그 친구와 둘이 영화를 봤던 524도 겉모습은 부장님같은 포스였지만 추진력도 있고, 섬세하게 사람들을 잘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사실, 당시에 아빠가 항암 중에 계셨기에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였는데 이 친구들이 많이 보듬어주었었다. 이들은 모두에게 그랬다. 늘 친절하고, 마음 따뜻하고, 은근히 신경 써주고 배려해주는 좋은 친구들이다.
그 둘 덕분에 조금씩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바라는 거라곤 모임에 자주 나오는 것 뿐인 두 친구들은 미대를 나왔기에 그림을 가르쳐주곤 하는데, 그냥 그게 그들의 기쁨 자체랄까.
2018년도에는 그림 모임에서 '서울그리기' 프로젝트를 추진해서 이화벽화마을 어느 갤러리겸 카페에서 전시회도 했었다. 나 역시 두점을 그려 참가했고, 완성도가 부족한 부분은 친구들이 도와주었다.
조즈곤이라는 별명이 있는 친구에게 수채화도 배우고, 오일파스텔도 배우고, 정말 많은걸 배웠다.
이렇게 순수하게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모임을 이끄니 늘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2015년도에 내가 잠시 좋아했던 친구도 있는데, 당시 나는 너무도 당당했기에 모두에게 '나는 쟤를 좋아하는걸?"하면서 광고를 하고 다녔다. 그 친구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미군으로 한국에 온 교포였다.
사실 그당시 내 체력은 무한체력에 가까워서 미군 정도는 되어야 밸런스가 맞았달까. 둘이 북한산을 7시간 오르기도 하고, 다른 친구와 셋이 하루 10시간을 넘게 걸어다닌 적도 많았다.
어느날 내가 고백을 했는데, 이 친구가 나를 대차게 차버렸다.
뭐 지는 다시 미국에 갈거라나(그러나 지금도 한국에 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광고를 했는데, 쉽진 않았지만 그건 그 친구의 마음이니 그러려니하고, 모임의 소중한 친구들을 잃을 이유는 없으니 잘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잘 지냈다. 종종 내가 먼저 농담으로 그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단, 그후로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생겨도 조용히 조용하다가 조용히 말기로 했다.
이젠 말하다가 모임 친구들이 나를 “아, 형”이라고 할때가 있다. “아 미안 누나” 하면 “그냥 형이라고 하라니까?” 해버린다 ㅋㅋ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임을 오고 나간 분들이 정말 많고, 그 중에는 그림의 점하나를 찍는데 온갖 정성을 들이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지금 이모티콘으로 대박이 나서 매우 잘되고 있고, 결혼을 해서 모임에는 나오지 않는다. 모임에 오래된 멤버들의 연애사와 가정사는 거의 다 알고, 모임에서 결혼을 한 친구들의 결혼식이나 집뜰이도 챙겨서 가고, 잘 지낸다.
2016년도에 기술사 공부를 한다고 1년동안 긴 잠수기간을 가졌고, 대차게 강제탈퇴 당하기도 했지만 꾸준히 모임장과 524가 나를 챙겨주어서 합격 후에 다시 가입하고, 종종 나가는 상태이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모임이 중단되었을땐, 마침 내가 혼자 살때라 우리집에 놀러와서 그림그리고, 공포영화도 보고, 생일도 챙겨주고 재미있게 잘 보냈었다.
코로나 중반부터 5-6명이 넘는 장소에는 가는 걸 극히 꺼려하게 되어서 모임이 재개되었음에도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모임이 너무 잘 되는것이다... 인원이 기본 10명이 넘는다.
모임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새해 모임이나 명절에 그림 모임이 열린다.
오늘 마침 새해이기도 하고, 지난 10년동안 나보고 '남자 친구도 못 만드는 그런 쓸데없는 모임에 나가서 뭐하니?'하던 동생이 그림 모임에 가입을 하고, 자신도 나가보겠다고 해서 모임에 다녀왔다.
나보다도 낯을 더 가리는 동생이 10명이나 되는 모임에 나가서 순순히 자기소개를 하다니.
집에서만 해도 자기소개 시키면 당장 도망칠거야.하더니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박수를 치며 꺄르르 웃었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과는 뭘 먹지 않는데, 나와 나란히 앉았음에도 내쪽으로 살짝 돌려앉아 음식을 먹는 동생의 모습이라니 ㅠ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생과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조심스럽게 '너 다음에도 그림 모임하면 갈꺼야?' 했더니, 사람이 5-6명이면 갈 수 있겠다고 했다.
마음이 몽글몽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