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주 전부터 고기가 매우 먹고 싶더니,
오일 전부터는 어지러움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다발성골수종, 희귀혈액암으로 돌아가신 아빠를 생각하니 혹시 유전인가 싶어졌다.
급기야 오늘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혹시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죽음 매뉴얼을 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나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건데, 이건 그저 여자들이 생리전에 겪는 빈혈이라고 하지만,
아니 세상에 이런 빈혈을 평생동안 한달에 한번씩 겪으며 사는게 여자의 일생이라니
물론 상상도 하기 힘든 끔찍한 고통의 생리통이라는 존재를 알고는 있지만,
이건 너무 하다.
여자들이 예민하고 감정기복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생체조건 아닌가
그동안 생리전 증후군이라는 건, 가벼운 우울증 정도 였던 걸 감안할 때, 나는 진짜 여자로서 삶을 날로 먹은 느낌이다.
어쨌든, 이번달 안으로 건강 검진을 받고, 한약을 해먹을 예정이다.
자, 내가 정말 병에 걸린 거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선은 의사선생님께 내 병의 일반적인 증상과 만약 통증이 있다면 통증이 시작되는 시기, 살아있을 수 있는 최단 기간과 최장 기간을 여쭤본 후, 통증이 시작될 경우 마약성 진통제를 투입하는 보편적인 시기를 알아봐야한다.
진통제 없이 견딜 수 있는 기간을 우선 알아보고,
살아있을 수 있는 최단 기간-일주일이 허용된다면 알프스에 다녀온다.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한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곳에서 사후장기기증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만약 불가능하다면 한국에 내가 죽을 타이밍을 역산하여 6시간 전에 장기가 적출되어야 하므로, 한국에 돌아가는 시간이 용이해야한다.
생존 최단 기간에 따라 알프스 여행은 옵션이다.
의식주를 고려해볼때,
우리나라의 헛된 미신을 따르는 엄마를 고려하여
내 옷들 중 싸구려 옷은 헌옷 수거함에 미리 가져다 버리고,
가격이 나가는 옷은 미리 아름다운가게에 가져다 줘야겠다.
죽는 순간에 땀이나 분비물로 인해 오염이 되면 악취가 날 수 있기 때문에 통기성이 좋은 운동복을 두벌 정도 남겨두고 입어야한다.
먹는 건 죽는 순간의 분비물 최소화를 위해서 왠만하면 죽기전 열흘 전까지는 먹고 싶은게 있다면 그때그때 먹도록하고, 이후로는 프로틴음료를 마실 참이다.
집의 경우는 보증금은 어쩔 수 없이 동생이 갖게 되겠지.
현재 내 모든 비밀번호는 동생이 알고 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몇푼 안 되는 재산이랄 것들은 동생이 엄마하고 남동생하고 똑같이 나눴으면 좋겠다.
암일 경우, 암 진단금은 받는 즉시 진통제 구입에 사용하고 치료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알프스 여행이 불가능할 경우, 강원도 속초 쪽의 숙소를 잡아서 며칠간은 설약산 뷰, 며칠간은 바다뷰로 즐기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려나, 로맹가리의 하늘의 뿌리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을 거다.
헤르만헤세의 데미안도 읽어야할테고,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도 읽고
가능하다면 죽기 전까지 프랑스어 공부를 해야겠다. 어린왕자는 원서로 읽을 수 있으니 내가 번역한 어린왕자를 다시 읽으면 되겠다.
내 인형과 피규어들도 어딘가에 먼저 기증을 해야지. 죽은 사람의 물건은 재수없을 수 있으니까.
책들은 도서관 같은 곳에 기부해야겠다.
시골에 있는 나의 보물상자, 친구들이 준 편지와 나의 일기장 중 유리와 보탱이 써준 편지는 챙겨서 들고 다녀야겠다.
그리고, SNS는 추모 계정으로 바꿔야할까?
브런치도 그렇고 아예 다 지우기엔 그래도 뭐라도 하나 흔적을 남기고 싶은게 인간의 욕심 아니겠나.
거창하게 죽음 매뉴얼이라고 했지만 뭐 더 딱히 할게 없다.
중학생 때 신청해 둔 사후장기기증으로 누군가 하나라도 잘 살게 되면 좋겠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하고싶은 것은 딱히 없다.
충분히 최선을 다했고, 후회가 없다.
장례는 치르지 않길 바라고, 화장도 불가능하고,
추모 계정이 뭔가 말을 남긴다면
"알을 깨고 나오려던 멋진 이상아님, 최선을 다해 살다 평안을 되찾다."정도?
더 바랄게 없다.
동생이 물어봤다.
"그래서 코피 났어?"
"아니."
"그럼 혈액암은 아냐. 생리통 약이나 먹어."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