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웃는 내 모습
계약 사무실
할아버지와 아저씨 중간이신 어르신이 들어오셨다.
“우리 아이가 계약을 한다는데 그래도 내가 알아봐야할 것 같아서..”
그 연령대의 보통 어르신의 말투였다. 주눅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른이라 상대방에게 존칭까진 차마 어려워하는
우리집은 가난한 집에 자식이 셋이나 있어
내가 대학을 다닐때, 부모님은 나를 큰이모 댁에 맡기셨다.
글쎄 그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하든 뭘하든 어떻게든 되지 않았겠냐만
자식을 한 번 잃어본 두분은 나를 연고가 없는 타지에 혼자 두는 걸 무조건 반대하셨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강원대학교 산림경영학과를 갔을 거다.
샤샤님이 좀전에 찍은 내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진 앞의 나는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봄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아 이게 마음이 아리는거구나
사진을 보자마자 눈물이 톡하고 터져 나왔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고 하지 않던가
해주지 못하는 슬픔, 마음아픔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히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그저 그게 너무 미안하다고 하셨었다.
아빠 걱정마요
내가 상아한테 아주아주 잘해줄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멋진 딸로 내가 잘 돌봐줄게
여동생에게도 고맙다.
우리가 다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금쪽같이 귀한 내 동생인데
상담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가다간 결국 아예 서로 영영 안 보는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실제로도 내 마음이 그렇게까지 닫혀가고 있었다.
우리 큰이모가 나에게 그런 마음이었을까
역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걸까
그래도 서로가 다른 점이 너무 많아서 가시덤불과 같은 길에서 서로를 찔러대며 가는 것 보다는
동생이 좋아하는 쭉 뻗은 도로 옆 즐비한 가로수와 하늘을 보며 여유있게 다른 길을 가는게 우리에게 더 좋을거라는 말이다.
아니 동생이랑 다시 떨어져사는 것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사랑했던 사람들이 헤어지는건 얼마나 더 아플까
그런데 너무도 간절하게
“30분 내의 출퇴근 거리에서 혼자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