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내부에만 존재한다.
어제는 상담을 했다. 선생님께서 장기 명상을 다녀오셔서 근 한 달 만에 뵈었다.
어제 상담의 핵심은 두 가지
1. should를 제거하라.
2.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게 사람인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또 다른 자아인지 늘 분리해 내기
피부관리를 하면서 본의 아니게 아침저녁으로 적어도 5분 이상 거울 속에 내 얼굴을 보게 된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불현듯 애처로움이 일기도 하고, 불현듯 나를 바라보는 나를 느끼기도 한다.
일전에 '거울명상'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나를 대우하면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르다.
명상의 마지막 단계인 반본을 위해서는 나를 없애야 한다고 했다.
매 순간, 내면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수많은 나의 존재들을 잠재우는 의식이다.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그런데 그동안 살아온 '나'는 '나'라고 철석같이 믿는 맥락적 자아의 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그 습관들을 끊어내는 거다.
'비합리적 신념'을 알아차리는 거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 등대지기를 염원하는 것
일전에도 상담시간에 이야기했던,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자아, 사실은 나를 지키고 보호하고 싶은 자아.'
누구로부터?
나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존재들로부터
그래서 나 같은 성향의 사람들은 인간 외의 존재들을 사랑한다.
인간은, 나를 상처 주는 방해꾼, 혹은 적이기에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고, 나를 매 순간 괴롭히고, 닦달하며 나의 행복을 방해 하는 방해꾼은 '상아야 우리 언제 볼래?' 하는 친구들이 아니라 그 친구들을 방해꾼으로 인식하는 내 안의 자아에게 있다.
그 자아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혼자가 되어야 해, 혼자가 되면 너를 상처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는 혼자가 더 완벽한 사람이야. 혼자가 더 잘 어울려."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 사소한 연락하나에 상대방을 나로 투영하고, 상처받지 않게 온 정신을 다 집중한다.
사실은 내가 그렇게 소중하게 대우받고 싶은 건데
생각해 보면 상처를 받은 건 나잖아. 내가 받아서 상처가 허용되는 거잖아.
그깟 거 내가 안 받으면 그만인데. 이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않았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어떻게 나를 키웠어?"
엄마는 "내가 어려서 뭘 몰랐어." 하면서 지레 미안해하셨다.
"나는 정말 엄마가 너무 대단해. 나는 정말 엄두가 안 나. 엄마, 내가 동생보다 더 까탈스러웠어?"
"유난했지. 알아주니 고맙네."
그럼 이제 자아를 놓아버리고, 오래된 습관을 놓아버리고
방금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초기화. 리셋. 할 수 있겠지?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