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돌아오는 화요일은 엄마 생신이다.
차를 없애고 처음으로 엄마에게 다녀왔다.
거의 6개월이 넘게 가질 않았다.
막상 차를 없애고 보니, 시골에 내려가는게 매우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원래도 그렇게 자주 집에 내려가는 편이 아니었고.
일요일에 당일로 다녀오려다가 일전에 엄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토요일 늦은 밤에 막차를 타고 갔다.
마침 전표가 매진이었는데 막차표가 한장 나왔다.
어차피 막차 타고 갈 줄 알고는 있었다.
밤 22시~23시 30분 사이에 자는데, 엄마를 기다리고 같이 집에 가니 매우 늦은 시각이었다.
이미 새벽 1시였다.
엄마는 '엄마랑 잘거야?'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냥 '응'하고 말았다.
자자고 누우셔서 한참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면서 "야, 우리 이러나 날 샌다. 자자"하셨다. 그리고 또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가 일전에 하신 말씀은 "같이 자니까 좋다."였다.
나는 차마, 당일로 갈 수가 없었다. 유명한 빵집에서 작은 케이크도 샀다.
초등학생 일때, 엄마 생신 케이크를 사서 오다가 미끄러져서 케이크가 찌그러진 적이 있다.
"수평 맞춰서 잘 들고 가셔야해요."
들킨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챙겨 가느라 진땀이 났다.
알고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나는 엄마를 너무나 사랑한다.
"엄마, 엄마는 아빠 어디가 좋았어?"
"그냥, 보니까 좋았어. 좋았으니 살았지. 결혼하고도 아빠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한테도 얼마나 잘했는지 아니? 그때 외할머니가 아궁이에 나무를 땠는데, 아빠가 만날 가서 나무를 해주다가 꾀가 나서, 옹기 만들때 쓰려고 떼오는 나무 트럭을 글쎄 매번 그당시 돈으로 10만원씩 들여서 외할머니한테 보냈단다."
아빠는 정말 좋은 분이셨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재미있고 바른 말 잘하고.
그의 삶 자체도 그렇게 바르고, 멋있고, 성실하고 정직하셨다.
엄마바라기셨다.
그리고, 사실은 엄마 역시 나보다 더한 유년기의 기억으로 당시 그저 마음이 아프셨던 것 뿐이라는 걸 나도 너무 잘 안다.
큰 딸은 엄마의 삶을 닮는다고 했던가.
어린시절엔 그저 내게 뭐라고 하거나 내 앞에서 종종 우는 엄마가 안쓰럽고 그저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꼭 엄마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내 존재로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은연 중에도 계속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가 미웠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엄마가 나를 낳으셨던 나이도 훌쩍 지나 나의 철없던 시절을 다 겪어내신 나이가 되니까
그냥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모습이 그저 좋을 뿐이다.
오래오래 곁에 계셨으면
그 어린 시절에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다시는 엄마와 아빠에게 자식을 잃은 슬픔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내 삶의 마지막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때 내 꿈은 단 하나였다.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고, 딱 한 시간 후에 죽는 것
물론 지금은 나 자신이 내 삶의 이유가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 모든게 엄마의 몫이었고, 내 남동생의 몫이고, 내 여동생의 몫이고
이 모든건 또 나의 몫이다.
그들의 몫을 다하는데 더이상 의미부여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이 생에 만나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다 또 이내 끌어안고 토닥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사실 엄마도 아빠랑 닮으셨다.
성실하고, 정직하고, 명석하고, 바른말 잘하고, 실제 삶도 그렇고
어쨌거나 엄마가 마음이 아팠던 그 시절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이기도 하다.
그 덕에 나는 염치를 알게 됐고, 최악의 상황을 고려할 수 있게 됐고,
늘 내 자신을 객관화해서 개선하고, 좋아지려 노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지 않을까.
모든 사건에는 양면성이 있다.
내 선택에 따라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되기도 한다.
엄마는 우리를 정말 잘 키우셨다.
막둥이로 사랑이 넘치게 자란 아빠하고,
불운한 어린 시절에 그 모든 책임을 다 떠 안고도 바르게 자란 엄마하고,
잘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사셨으니
참 부러울 따름이지만 그것 또한 그들의 몫이었다.
"엄마는 남편복이 있어, 그치?"
물론 아빠도 아내복이 있었지.
엄마는 지금도 매끼니 새로 밥을 지어 드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