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953 삶은 사랑을 완성하는 놀이터

by Noname

사랑으로서 행하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기쁨의 감동과 충만함으로 나의 영혼을 채우고

무한하게 샘솟는 열정의 샘물을 마시고, 강인한 육체로 하는 것 없이 그저 사랑이 되게 하소서.


동생에게 말했다.

"나 말이야, 기술사 공부하던 때처럼 그저 그렇게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신나게 공부하고, 그때의 그 기쁨과 열정으로 살고 싶어."


"공부하는 게 즐겁다니... 정말 이상하군ㅎㅎ"


여전히 코로나 후유증으로 어지럽고, 힘들었다.

휴가를 내고, 수액을 맞았으며 수액을 맞은 후, 동생과 기운을 내겠다며 고등어구이와 회덮밥을 먹었다.

손에 가득 들린 5일 치의 양약을 보고 있자니, 정말 아득해졌다.


약이 먹기 싫어서, 생각해낸 방법은 '연단'과 '명상'이다.

연단은 한 자세로 30분 이상을 버티는 것이고, 명상은 말 그대로 명상이다.

그간 '조디스 펜자'교수님의 '믿음과 인식을 바꾸는 명상'을 종종 하긴 했지만 대충이었다.

누워서 하다가 잠이 들거나, 차에서 운전하면서 되지도 않게 흉내나 내곤 했다.

사실 명상을 한다고는 하지만, 거의 1년 6개월 만에 제대로 바닥에 가부좌로 앉았다.


첫 줄의 메시지는 연단과 명상을 하니 오랜만에 통찰을 들은 것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몇몇 순간들이 있는데, 시기를 나눠 보자면 다음과 같다.

'솔플기', '팀플기'


1. 솔플기

솔플기의 첫 번째는 21살 겨울 와우를 하던 시절이다. 그땐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나의 캐릭터의 레벨업을 위해서 지침 없이 '중독'되어서 게임을 했다. 난 여전히 '티리스팔 숲'을 그리워한다. 비록 다시 게임을 하진 않지만, 어쩌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행했던 최초의 도피행각이었기 때문이었지 않을까 싶다.


솔플기의 두 번째는 대학교에서 부전공을 하며 '컴퓨터 구조론'을 공부하던, 22살부터 졸업하기 전까지의 도서관 생활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때도 중독에 가깝게 전공 공부를 했는데, '자료구조론', '인터넷 개론' 등등 컴퓨터공학 부전공 수업이 너무 재밌었고, 큰 깨달음을 통해 결국 전공인 경영학부의 수업까지 정말 재밌게 공부했다.


솔플기의 세 번째는 혼자 산행을 했던 기억들이다. 처음 슬리퍼를 신고 불암산을 오르던 그때, 나는 영화 '아바타'와 '와우'의 '샹도르'(내 주 캐릭터 이름)를 떠올렸고, 인생이 게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나의 몸과 산과 나무와 바람과 소통하는 그 시간이, 그 세월을 이겨내고 지금, 여기에 함께하는 그 시간들이 너무도 귀하고 감동적이라서 20대 중반 이후로는 술을 마신 다음날에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아침부터 산에 가곤 했다. 산에 다녀오면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려서, 동생은 '아주 산에 다녀와서 기분이 또 좋으시구먼!' 했다. 그럼 나는 '헛. 어떻게 알았지!' 하면서 매번 놀랐다.


솔플기를 지나 팀플기가 왔다.

사실 나는 친한 사람이 정말 많고, 밝고 유쾌한 성격이지만 어떤 유대를 만들기를 후천적으로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더더욱 혼자서 뭔가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영학과는 그런 나를 그냥 두지 않았다. 팀플을 하게 되었고, 등 떠밀려 발표를 하게 되고, 등 떠밀려 조장이 되고 뭐 그런 날들이 있었는데, 게임을 할 때도 어쩌다 전사를 하게 돼서 등 떠밀려 팀플을 하게 되고, 등 떠밀려 리딩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게임할 때도 어쩌다 보니 운영진, 일할 때도 어쩌다 보니 PL/PM, 지금 회사에서도 어쩌다 보니 팀장이네.


2. 팀플기

오늘 생각을 해보니, 정말 대단했던 일이 있었다. 난 타인에게 굳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굳이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가만히 있어도 시끌벅적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5명 이상이 모이는 자리를 극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첫 번째 팀플 기는 대학교 1학년 봉사활동과 전혀 관련이 없던 내가 친구 따라 교회에 가서 크리스마스 봉사활동 준비를 하던 때다. 풍선 만들기를 배웠고, 같이 가자던 친구는 첫날 쌀국수를 사주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 혼자 몇 번을 갔던 기억이 있다.


두 번째 팀플 기는 '박노해 시인'께서 계신 '나눔 문화'라는 곳의 '나누는 학교' 봉사활동이었다. 그때 정말 나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 그리고 다른 친구 교사 선생님들까지 그 많은 사람들과 거부감의 'ㄱ'자도 모르는 사람처럼, 주말만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뛰어놀고,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고, 그림 그리고, 자처해서 사진을 찍고, 활동기를 써서 글을 남기곤 했다.


세 번째 팀플 기는 서비스 기획 업무를 배우기 위해서 별도의 스터디를 찾아 공부하던 시절이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나는 웹/서비스 기획 업무를 하고 싶었다. 두물머리 농민 돕기 웹사이트를 보고, 나도 세상을 돕는 IT기획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 간절하게 찾아 기쁜 마음으로 오로지, 세상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공부하고, 경험을 나누고, 스킬을 쌓았다.


- 참고로 내가 이직을 하게 되는 순간은 늘,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을까? 이것이 도덕적/윤리적으로 세상과 사람들의 이익에 배반되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 때문이었다. 정말 그랬다. 결국 세네갈로 봉사활동을 떠나게 된 것도, 그런 열망 때문이었다.


네 번째 팀플 기는 역시, 코이카(KOICA, 한국 국제협력단)를 통해 20살 때부터 열망하던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던 때이다. 우리 기수는 13명이었고, 내가 머물던 세네갈 띠에스에서는 5-6명의 활동 단원이 있었다. 나는 세네갈에 간지 3달 만에 즉시 IT교육을 시작하였고, 오로지 학생들과 소통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불어'와 '월로프어'를 열심히 습득했다. 매일매일 꾸준히 공부해서 염원하던 '어린 왕자' 불어 원서 통번역을 했고, DELF B1(프랑스어 레벨로 중학교 수준)을 취득했다.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똑똑한 현지 친구들 덕분에 무사히 1년 간 수업을 진행했다. 한국 단원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하루 9시간씩 주 5일 수업을 해서 몇몇 한국 단원들로부터 한국인들이 인맥이 될 텐데, 너무 한 거 아니냐는 말을 듣곤 했지만, 내가 간 목적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나는 전염병에 걸려 한 달간 격리되고, 장염으로 두 번이나 실려가고, 치열이라는 극악의 질병을 얻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되다는 생각 없이 겸허한 마음으로 오로지 나의 학생들을 가르쳐서 많은걸 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제법 행복하게 보냈다.


다섯 번째 팀플 기는 기술사 공부를 하던 시절이다. 기본반을 막 마치고, 심화반에 가서 본격적으로 기술사 공부를 시작하는데, 우리 조원 분들은 의욕이 별로 없어 보이셨다. 시간이 없다는 말과,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별도의 스터디를 할 수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옆 조로 갔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 다면 함께 공부해도 될까요?'그때 허허 웃으시면서 나를 받아주시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너무나 감사하다. 나는 그때, 물론 아버지의 병환도 있었지만, 세네갈에서 전문성과 공신력이 부족해서 미쳐 다 해줄 수 없었던 것들을 IT를 통해서 꼭 해주고자 기술사 취득을 하게 됐다. 웹서비스 기획 실무경력 4년은 부족했다. 나는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더 많이 돕기 위해서.

토요일에 학원이 끝나면 김밥을 먹어가며 밤 10시가 넘도록 공부를 했고, 다음날 일요일에는 또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스터디 장소로 10시까지 모여 밤 8시가 넘도록 공부를 했다. 평일에는 아침 7시부터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고, 업무를 처리하고, 남는 시간엔 또 공부를 했고, 점심시간도 아까워 점심시간엔 도서관에서 또 공부를 하고, 오후 2시에 밥버거 같은 것을 사 먹었다. 그러고는 퇴근해서 또 도서관에서 밤11시가 넘도록 공부를 했다. 그러고 집에 와서 샤워를 할 때면,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다. 내가 이렇게 배운 것을 가지고, 아프리카로 가서 이러이러한 기술로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이러이러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서 그들이 상상하는 어떤 것이든 이룰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이 모든 순간들에는 피곤함이나 힘듦이나, 해야 한다는 억지스러운 마음이 없었다.

그냥 했다. 그 모든 순간들이 기쁨이었고, 감동이었고, 사랑이었다.


중국 인사말에 이런 말이 있다.

一路順風

'순풍을 만난 돛 단 배'와 같이 하는 일이 잘되길 바란다는 말이다.


2020년 6월 내가 교육 업무를 맡게 된 그때,

코로나 시국에 단 3일 만에 춘천에 교육장을 마련하고, 교육생들의 주머니 형편에 맞는 메뉴와 숙소를 별도로 저렴하게 제공받을 수 있도록 협상을 할 수 있었던 건, 개인적인 욕심이 철저히 배제된 채로

오로지 '교육생들이 양질의 교육을 보다 잘 받게 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 덕분이었다.


비슷한 시기 진행된 다른 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른 교육들은 지원금을 주고, 좋은 입지에서 교육을 하기 때문에, 내가 회사에 오기 전 이 프로젝트는 이미 진행 가능성이 희박한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 교육을 듣기 위해 지원해주고, 면접을 와준 교육대상자들에게 매번 '여기까지 와주셨으니, 저도 이 교육을 소개드려야지요.' 하면서 교육의 개요와 커리큘럼, 교육을 통해 얻어갈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였고, 3주라는 짧은 일정을 남겨두고, 모집 정원을 모두 채워 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교육이 진행되는 중에도, 한동안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인사를 하고, 그들이 교육을 포기하지 않도록 독려했고, '여러분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하면, 우선 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끝까지 해내야 한다.'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내가 경영학도로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프로그래밍을 포기하게 된 이야기를 해가면서 말이다. 3개월의 과정 동안 두 차례의 1:1 면담을 진행했다. 다행히도, 세 개의 교육 프로젝트가 병행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교수설계와 기획 과정이 코로나 덕분에 각 단계가 엇갈린 파이프라인으로 진행되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나를 믿고 교육을 들으러 와준 교육생분들 한 분, 한 분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빅데이터 분석가가 될 수 있는 씨앗을, 분석가가 되지 않더라도, 데이터 기획자와 같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엔 힘이 든다.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욕망과 안정감을 '바라게 되었다.' 나의 시간을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쓰고자 하였고, '나'와 '타인'을 구분 짓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배타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했다.

기억하는 한 나는 단 한 번도 나 자신의 안위를, 나의 안정과 오로지 나의 편안함을 추구한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이토록 욕심이 '그득그득', 탐욕이 넘치는 때가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법정스님이 내 마음의 멘토였는데, 딱 그때 약 20년 만에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외면했다.)


일을 잘 풀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고, 그저 귀찮고, 따분하고, 지겨울 때가 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시간을 쓰고, 정확하게 선을 긋고, 독단적으로 오만하게 변하는 시기가 온다.

그건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랑으로 일했는가,

나는 겸손했는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일했는가,


이 세 가지에 답을 해보면 지금 내가 답답하고, 힘겹고, 지겨운 이유를 알 수 있다.


게임을 하다 보면 꾸준히 해야 하는 일반 몹 잡기, 퀘스트 등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레벨 업이 되어있거나,

빠르게 레벨업을 하기 위해 해당 레벨에 조금 어려운 던전에 가기도 한다.


인생이 그런 거 같다.

비록 레벨이 역행하지는 않지만

게임보다도 잔인하게도 사람은 정신 수준이 역행하기도 한다.

다행인 건 그랬다가 바로 더 높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자율성이 더 크달까 ㅎㅎㅎ


하여튼, 인생에 주어진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 있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삶의 목적이 '나'자신에게 향하는 '이기심'보다는 나와 타인의 경계조차 없는 '이타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역행하니, HP(체력)가 뚝 떨어지고, 마나(정신력)가 깎인다.


기술사 시험은 겸손을 탑재하는 시험이라고 늘 이야기하고 다닌다.

나는 겸손했던가, 내가 이 것들을 이루고, 초심을 잃진 않았나.


이렇게 깨우쳐가면서 '사람이 되는 거'겠지


누군가 '자기 계발서를 많이 읽으시네요'라고 하셨다.


'제가 인격적으로 얼마나 미성숙했는지를 깨닫고 나니, 자기 계발서를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실이다. 나의 그릇은 나의 인격적 성장으로서 밖에 확장할 수 없다.


어지러움증이 가셨다.

뭔가 어려운 과제를 푼 느낌이다.

명상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과제를 풀었다고 된 게 아니다.

실천해야 한다. 흔들림 없이,


순식간에 악의 무리에게 눈꺼풀이 흐려진다.


정신 차리고 살자.

작가의 이전글마흔-954 강아지 발 꼬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