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954 강아지 발 꼬순내

by Noname


꿈에서 조그만 강아지들이 나왔다.

시골 우리집엔 아무도 없었고,

차를 타고 어딜 다녀온 나는 강아지 몇마리들의 꼬순내와 작별을 하며

손바닥 보다 작은 강아지들이 나를 따라오다 다치지 않게 소중하고 소중하게 내려놓고

떠나오던 찰나에 꿈에서 깨었다.


시골 우리집은 시골마을의 창고를 개조한 집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 집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아지들을 생각하자니 어릴때, 부모님이 개를 키웠던 생각이 났다.


언젠가 엄마에게 갔을때,

엄마는 그 이야기를 했다.


참 힘들었다.

너희들 키워야하는데 돈이 없어서 처음에는 항아리를 가져다 팔고,

항아리 팔고 다니는게 고돼서

그거 판돈을 모아 개를 먹이고,

개를 판 돈을 모아서, 돼지를 먹이고,

돼지를 판 돈으로 소를 키우고, 그랬더랬다.


아빠 말대로 동생이 죽었을 때, 상아 너 하나만 키웠다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텐데,

엄마는 그 텅빈 가슴을 채울 수가 없어, 동생들을 낳았다고 하셨다.


아빠와 엄마가 결혼할 때

우리 할아버지는 항아리를 만들고 계셨고

항아리를 만들어서 번 돈은 같이 일하시는 분들과 똑같이 나눠 가졌다고 하셨다.


그래서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서로 나누며 그렇게 사셨다고,


큰아버지와 우리 아빠는 20살 터울인데, 형제자매가 10분은 되시는것 같다.

정확히 세어보려 한 적은 없다.

그렇다보니 큰아버지의 아들이 낳은 아들은 나의 조카가 된다.


명절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우리 집에는 조그만 채마밭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항아리 공장을 확장하느라고 없어졌다.


우리 엄마 아빠는 그렇게 두분이서 차곡차곡 온갖 고생을 해가며

삶을 일구셨다.


그러고보면 엄마가 툭하면 나에게 '너만 아니었으면'하면서

원망했던게, 어찌보면 '내가 너를 사랑해서'라는 다른 표현이었겠다싶다.


엄마하고 아빠는 초등학교까지만 교육을 받으셨다.

엄마는 머리가 꽤 좋은 편이었는데,

외가댁에서 첫째이니, 어릴 땐 동생들을 돌보고, 커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고 했다.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 있어,

엄마는 어쨌든 상아는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나보고 공부하라고 뭘 한적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컴퓨터 학원 외엔 억지로 보내신 적도 없다.


학원을 가지 않아도 그냥 보통은 하니

집안 사정상 학원보내긴 부담스럽고, 크게 닥달할 것없이 그냥 두셨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유와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면 곧 죽어도 안했는데

공부 역시 좀더 열심히 할 동기가 없어서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땐 참 철이 없었다.

아마 매일 휘파람 휘휘 불며, 두분이서 장난치고, 꼭 껴안고 있는 모습만 보이니

부모님이 고생한다는 생각은 1도 하지 않은 것 같다.

부모님이 나에게 시킨 건 가끔 소에게 여물을 주라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때도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 적어도 나와 동생들은

용돈도 넉넉하게 주셨고, 고기 없인 밥을 안 먹는 나에게 고기반찬을 해주셨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는건 '삐삐'빼곤 다 해주셨던 것 같다.

다만 엄마는 또 나에게 그당시 아빠가 벌어오시는 월급이 너무 적다며

본인이나 하니까 이정도 사는거라고, 그렇게 수도 없이 말씀하셨다.

능력없는 사람 만나 고생한다며 나에게 아빠 욕을 그렇게 했다.


부족함 없이 해주시면서도, 본인이 너무 고되니까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는 의도셨으려나.

그저 감정 발산이셨으려나, 잘 모르겠다.


어린 나의 생각엔, 처음에는 서럽고, 슬펐지만

머리가 커가면서 중학생 때부터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둘이 좋아서 날 만들었고,

어차피 아빠 아니었다고 해도 본인이 부잣집에 시집갔을 확률은 그렇게 높지 않은데,

차라리 그런 한탄을 할바에 본인이 더 능력을 높이지 나에게 왜 저런담


배우지 못하고, 삶이 고됐기에 어쩔 수 없는 일들이었다.


강아지 꿈을 꾸고 났는데, 아직도 코끝에서는 꼬순내가 난다.

부모님의 삶이 참 힘들고 고됐다는 걸 알겠다. 코끝이 시리다.


참 그렇게 고되게 살다가 아버지는 참 고되게 돌아가셨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놀면서 원없이 보낸 20대를

엄마는 나를 키우고, 뭐라도 해서 돈을 벌고, 내 동생들을 키우다가

늙으셨구나.


억울하겠다.


내 바로 아랫동생은 내가 7살이던 당시, 유치원 졸업식날 죽었다.

그로부터 몇년동안 아빠와 엄마와 나는,


서로를 대할 수가 없었으리라.


참 슬펐겠다.

나를 보면 동생이 떠오르니,

내가 얼마나 어렵고, 미안하고, 애처러웠을까.


나는 늘 뭔가를 찾고 다녔다.

한때는 서울이모가 푸들 두마리를 주고 갔는데,

그 아이들이 집을 나갔다.


나는 그 아이들은 하루 왠종일 찾고 다녔다. 동생을 찾듯이.

한달 내내 그러다가 내가 강아지를 찾고 다닌다는 말을 들으셨는지

어느날 내게

아빠는 저기 어디서 봤다. 걔들 잘 지낸다. 이제 찾지 않아도 된다.

라고 하셨다.


너무 고통스러운 순간을 살아내기 위해선 방어기제가 나타난다.

나는 왠만한 행복한 기억은 잊었다.


어릴 때부터 의도적으로 잊으려고 노력한 적도 많다.

그래서 지금도 잘 잊는다. 너무 심하게 잘 잊어서 친구들이 서운해하기에

잊지 않으려고,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는데, 기억은 잘 못한다.


동생에 대한 기억은 몇개 없는데

워낙 착하고, 다정했던 동생이라서 나에게 양보하고, 나를 다독여줬던 기억들이다.

그 기억은 30대 중반에 명상을 하면서 겨우 찾아낸 기억들이다.


다섯개도 안 되는 그 기억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나는 심장이 찢어질듯 울었다.


그러니 아빠와 엄마는 얼마나 그 슬픔이 가슴에 차올라,

숨이 막혔을까.


죽은 사람의 물건은 모두 태워야한다며

사진 한장 남기지 않으려 하실 때,

그 어린 내가 숨겨놓은 동생 사진이 몇장 있었다.


어린 나는 종종 동생 사진을 꺼내어보곤 멀뚱멀뚱 바라봤다.

사실 동생 생각을 하며 울 수 있게 된 것 역시

30대 중반 명상을 배우고 부터이다.

20대 이전에는 동생을 생각 조차 할 수 없었고,

어린 시절엔 여동생과 7살이나 터울이 나는데도,

사람들이 의아해하면

막둥이를 낳은거다, 라는 헛소리를 했다.


다른 사람들이 평범하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보고도,

쉬이 엄두가 나지 않는 건,


부모님의 삶처럼 희생하고 산다는게 힘들어 보이기 때문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두려움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그게 얼마나 말 그대로 '가슴이 저리고, 뼈가 애리고, 심장이 찢겨나가는' 고통인지

눈으로 보았다.


가슴으로 느끼면 도저히 살아낼 수가 없어서

참 오랫동안 방어하고 살았다.


지금도 그때의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순 없다.

그저 그러하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슬픔을 거부한 탓에 몸에 탈이 많이 났었다.

슬픔을 거부한 덕에 몸에서 그 슬픔을 받아내느라

몸이 아팠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도 감정적으로 흔들리게 되면 몸이 아프다.

내가 감기에 걸리거나 체하는 건 연애할 때 밖에 없다.


오늘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해서

후유증으로 한참 자다가, 깨어나니 이 시간이다.


새끼 강아지들의 꼬순내가

아직도 나는 것 같다.


참 고되고 힘든 삶을 사셨다.

자식들 편하게 행복하게 살라고,

참 많이 고생하셨다.


늘 휘파람을 불며 일하시던 아빠는

밥상머리에 모이면 우스갯소리로 우릴 웃겨주시던 아빠는

대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 걸까.


한참 예뻤을 20대를 우리를 키우느라 다 보내신 엄마는

대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 걸까.


내가, 그 마음을 알아주길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하노라고.'

얼마나, 애가 타게 호소하셨던 걸까


본인이 온전히 사랑으로 받은 것이 없어

예쁘게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을 나는 왜 모르는 척 했을까.


내가 이렇게 나로 살 수 있게

키워주신 그 은혜를 잊고,

엄마는 왜 그러냐며 미워하고 있었을까.


고생 시키지 않고, 곱게, 하고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리게

자유롭게,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마흔-955 급할수록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