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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Oct 18. 2023

가볍게 걸어도 등산은 등산

- 집 근처 둘레길 걷기

“엄마 내일 산에 가기로 해놓고 늦게까지 술을 먹으면 어떡해? 밤 11시에 손님을 더 데리고 오는 게 어디 있어?” 

아, 이건 부인들이 남편에게 많이 하는 대사 아닌가. 아들이 현관에서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는데 내 귀에 바싹 다가와 눈을 크게 뜨고 속삭인다. 아닌 게 아니라 시계가 새벽 1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미안, 미안, 내일 좀 늦게 깨울게. 우리 둘레길 걷기로 하자” 

북한산 백운대에서 목표지점이 북한산의 둘레길로 바뀌는 순간이다. 

“엄마, 다음번엔 어느 산으로 갈까?” 

아들이 종종 다음 산행을 어디로 갈지 먼저 물어온다. 산에 가자면 질색을 하던 아들이었는데 어느새 엄마 글 쓰는 걸 돕는다는 것이 자기 일이 되어 있다. 

“한 번은 내가 쓰면 안 돼? 내 입장에서 말이야” 

“왜 안돼? 인수가 쓰고 엄마가 맞춤법은 수정해 줄 게. 재밌겠다” 

아들이 식탁에서 수정 중인 첫 번째 연재 글을 읽더니 수정할 곳까지 자세히 알려준 터였다. 어느 방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는지가 빠져 있다고 알려줘서 수정했다. 함께 다녀온 산행을 엄마 입장에서 쓴 글로 읽으니 새로웠나 보다. 

“엄마 정말 몰랐어? 내가 12시 전에 집에 가고 싶었는지?”

“응,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 나중에 얘기 나누다 알게 된 거지”

재밌다며 학교 홈페이지에도 올려 달라고 한다. 급기야 자기도 한번 쓰겠다고 하다니. 아이 관점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갑작스런 이웃과의 술자리로 못가게 된 북한산 백운대는 아이와 몇 년 전에 둘이 이미 다녀왔었다. 백운대를 오르려면 마지막에 쇠 봉을 잡고 계단을 올라야 했다. 경사가 꽤나 가팔랐다. 아이는 “엄마 무서워”를 연발하며 올라갔었다. 나도 아이와 함께 오르려니 마지막 쇠계단 난간 길이 이렇게 길었었나 싶었다. 어른과 갈 때와 아이랑 갈 때는 같은 길도 다르게 느껴진다. 정상에 올라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아차, 도전 100 산 인증을 안 하고 왔다. 그걸 안 아이가 “다시 올라갔다 오자”고 했었다. 올라갈 때 무섭다고 한 걸로 봐서 아쉬워만 하고 간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여기까지 온 게 아까우니 다시 올라갔다 오자고 했다. 그 때가 아들이 나보다 키가 작을 때 였는데 나보다 조금 더 커진 지금 데려가면 오르며 뭐라고 할지 궁금했는데 아쉽지만 백운대 재 도전은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아이와 가는 등산이 언젠가부터 큰 산을 찾아다니은 하루 전에 근처에 가서 잠을 자고 다음날 오전에 출발하는 거였다. 높은 산은 5~6시간은 걸리니 해 지기 전에 안전하게 내려오려면 오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당일로 다녀오려면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데 운전하는 나도 힘들지만 아이도 컨디션을 나쁘게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꼴이 되었다. 한번 시도해 봤다 새벽바람에 돌아서 온 이후로는 다시는 그렇게 일정을 잡지 않는다. 요즘엔 토요일에 오전과 일요일 오후에 수업이 있어 수업들을 빠지지 않고 다녀올 수 있는 곳을 찾아보는데 가까운 데 산이 꽤나 많이 있다. 산행의 목적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정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둘레길 걷기나 산행 지도를 보며 새로운 코스를 조합해서 가는 방법을 발견해 가는 중이다. 그랬더니 산행을 대하는 마음이 한 결 가볍다. 


집에서 둘레길 입구까지 금방이다. 파란 마트 골목으로 올라가 낮은 빌라들 사이를 질러간다. 

“엄마, 걸으면서 핸드폰 하지 말라며!”

“내가 그런 얘기를 했었니? 까먹기 전에 영화표 할머니 보내 드리려고. 일 있으면 천천히 걸으며 핸드폰을 봐도 되는데”

“그러다 차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두 손을 크게 흔들며 차가 급하게 나오는 흉내를 낸다. 

“여긴 갑자기 차 나올 곳이 아니야.” 핸드폰을 계속 보며 대꾸를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확 나올 수도 있어!” 다시 온몸으로 차가 갑자기 나오는 상황을 연기한다. 

“아이고, 그럴 일 없는 작은 거리야.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 걱정하지 맙시다” 아이는 내 대답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곧 나타날 둘레길 입구에 도착하기 전에 영화 티켓 처리를 끝내고 싶어 마음이 급하다. 

“이제 끝! 이리로 들어가자.” 


포장된 도로에 옆에 나무 아치로 세워진 문이 있다. 아치 문 안 쪽에는 흙 길에 야자수매트가 깔려 있다. 아치를 통과해 둘레길로 들어서자 숲 냄새가 난다. 길 왼편에는 어른이 몇 걸음이면 오를 수 있는 작은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이 겨울에 눈이 오면 어린이집 아이들의 눈썰매장이다. 지금은 흙 민둥산이다. 아들이 대안 초등학교에 처음으로 등교하던 날 이 문을 지나 오늘 걸을 두레길로 산을 넘어 학교에 갔었다. 학교 가는 길 자체가 처음인 아이는 엄마가 하자는 대로 따라왔다. 어린이집에서 둘레길 탐험대로 갔던 길이라 낯설어하지 않았다. 둘레길로 가다 우이천을 따라가기도 했다. 빙 둘러가는 길이라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우이천을 따라 걷다 징검다리가 나오면 물을 건너보겠다고 했다. 옷이 젖으면 다시 집까지 돌아가야 하나 조마조마하면서 지켜봤었다. 커다란 돌이 흔들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물에 빠지진 않았다. 동네 길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지도상으로 직선길에 가까웠다. 이 길로 가면 산이나 우이천을 따라 걷는 길 보다 십 분이 덜 걸렸다. 더 걸어갈 길이 없을 때 즈음 버스를 탔다. 버스가 얼마나 금방 가는지 깜짝 놀랐다. 이렇게 편하게 올 수가 있나 싶었다.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코너를 돌아 버스 한 정거장 정도를 걸어가면 조그만 개천다리 건너에 작은 마당 있는 학교에 드디어 도착했다. 나중에는 이 한 정거장마저도 버스 환승해서 갈아타고 갔다. 그러다 보면 한 학기가 끝이 났다.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면 첫날은 산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했다. 3학년 때까지는 이어져 왔는데 고학년이 되면서 언젠가부터 맥이 끊겼다. 등교 길뿐이겠는가. 엄마가 권하는 것들에 선선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어제 술자리는 뜻 맞는 학부모들이 학사 이전 기금을 위한 주점을 연 것이 계기가 되었다. 

“너네 학교 이사비용 마련한다고 2학년 부모들이 마련한 일일 주점이 어제 있었어. 안주 배달이 와서 우리 집에서 아빠들 술자리가 만들어졌고 엄마는 대연이네 선물로 온 안주 함께 먹으며 어린이집 엄마들이랑 함께 시간 보내다 왔지” 코로나로 오랫동안 못 보던 사람들이 계기삼아 여러 곳에서 모였다. 산에 가기로 해놓고 늦게까지 술 마셔 불만인 아이에게 어제 상황을 설명했다. 

“대연이가 졸려해서 엄마 있던 자리 파하고 우리 집에 먼저 들러 내려주는데 어린아이들 다 재우고 나온 엄마가 있어 우리 집 가서 한 잔 더 하고 가라고 권했지. 아이가 어린 집 엄마들은 밤에 나오기가 쉽지 않거든. 우리 집은 밤늦게까지 어린이들이 쌩쌩하잖아. 마침 운전해 준 아빠가 좀 있다 데리러 온다고 해주는 바람에 차에 있던 사람들이 다 우리 집까지 들어오게 된 거지” 11시가 넘어 어떻게 사람들을 데리고 집에 올 수 있냐는 아들의 항의에 대한 내 답변이었다. 이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끄덕끄덕 해준다. 


6학년이 된 아이와 오랜만에 함께 왔다. 출발 전에 물도 간식도 필요 없다고 해서 빈 몸으로 걷기 시작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입구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가 어릴 때는 한번 데리고 밖에 나가기 힘들었고 나가서 한번 놀기 시작하면 데리고 들어오기 힘들었다. 커서도 변함없다. 

“왜 빨리 가고 싶어?” 오늘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할 게 많아.”

“뭐 해야 하는데?”

“영어 숙제 있어. 영작 10개. 단어 50개 외워야 해. 과학 실험 준비도 해야 해. 엄마 페트병 뚜껑 구멍 뚫는 거 있다고 했지? 여행 다녀온 사진도 30개 골라서 선생님한테 보내야 해. 홈페이지에 여행 소감도 올려야 하고” 

“금방 하겠네” 아이가 할 일을 가늠해 보고 대답했다 혼만 났다. 

아이 부담은 내가 도와주겠다 말해서 해결되지 않았다. 엄마의 도움에 대한 믿음이 없다. 하나씩 짚어 가며 얼마나 걸릴지 예상해 보면서 걸었다.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도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그럼 구멍 뚫는 건 아빠가 도와주면 금방 해결할 수 있네. 구멍 뚫는 드릴은 신발장에 없으면 어린이집에 가서 빌려오면 돼. 사진 고르는 건 내가 도와줄게.” 

마지막까지 아이 몫으로 남은 것은 영어단어 외우기와 영작하기다. 


숲 속으로 작은 흙 길이 이어진다. 

“지리산 올라가는 길 같아” 

맞아, 지리산 능선길이 이랬지. 갈색 난간과 둘레길 표지판을 계속 따라가면 산 길은 어느새 마을과 연결된다. 약수터가 나타났다. 늘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이번엔 물 마시려 멈췄다. 물이 쫄쫄 나오는 약수터가 아니라 바위 아래에 작은 문이 있다. 손으로 당겨 여니 그 안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물이 없는데?” 

맑은 물이 투명해 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옆에 안내문 대로 큰 바가지로는 물을 뜨고 작은 바가지에 옮겨 마셨다. 

약수터 물을 처음 먹어본 아이는  

“독이 들어 있을 것 같은데” 하고는 한 모금 마신다. 

먹고도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한다.  

“윽…… 나도 그래” 죽는시늉을 하며 장난치며 계속 길을 걸었다.  


얼마큼 가서 땀이 났는지 아이가 머릿속을 긁기 시작한다. 긁적긁적 살살 긁기 시작한 것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으며 긁는다. 

“머리 안 감았니?”

“아니, 감았는데. “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니 억울해한다. 걸어가다 이제는 어깨를 긁기 시작한다. 어깨를 긁던 손이 겨드랑이를 타고 옆구리를 긁적거린다. 팔을 꺾어 등도 긁는다. 팔의 활약이 대단하다. 

“너 샤워할 때 비누 쓰니?”

아이가 샤워할 때 같이 들어가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코로나로 아빠와 목욕탕에 간 지도 오래되었다. 처음에 혼자 닦겠다고 할 땐 나오면 로션이라도 발라주며 잘 닦았는지 확인했는데 요샌 샤워실 나오면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감싸고 방으로 쌩 들어가 버린다. 

“어… 아니”

“비누를 써야 피부에 사는 벌레들이 없어지는데. 우리 땀구멍에 바이러스랑 세균이 있는 건 알지?”

아이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다행히 잔소리라고 튕겨내지 않는다. 

“우리 집에 가는 길에 바디워시 하나 사가자” 

“엄마. 내 목욕으로 한 건 잡았네, 잡았어.” 알겠다고 하면서 두고두고 얘기할 까 봐 경계하는 눈치다. 


공룡 등뼈처럼 바위가 오돌토돌하게 박힌 곳을 지난다. 여기까지 오면 9부 능선 넘은 것이다. 

“네가 발견한 공룡 등뼈처럼 생긴 데 나왔다. “ 

1학년 초 등굣길에 아이가 반짝이는 돌덩이를 파내서 가방에 넣어 짊어지고 가겠다 했던 적이 있었다. 학교에 가져다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 했었다. 작고 뾰죡한 돌들 아래로 얼마나 커다란 바위가 있는 건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등지느러미를 반짝이고 있다. 


오랜만에 왔지만 아이는 길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 저기 가면 이제 의자가 나와” 

그랬었나? 거의 끝나가는데 의자가 있겠나 싶었는데 둘레길 출구 아치문 전에 나무 벤치 3개가 보였다. 앉아서 좀 쉬었다. 이제 아치문을 나서면 시멘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단독 주택 몇 채, 보험회사 연수원, 자수 박물관을 지나자 평지에 도착했다. 빌라단지를 돌아 어린이집을 지나면 소나무가 가득한 솔밭공원으로 이어진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산은 하산이다. 나는 해장국으로 뜨거운 국물을 떠올렸고 아들은 시원한 버블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밥 먹기 전에 버블티를 먹으면 밥맛이 없고, 아들은 밥을 먹으면 버블티 맛이 없을 터였다. 밥은 집에 가서 먹기로 양보하고 버블티 집으로 들어섰다. 아들은 흑당 버블티를 고르고 나는 얼그레이 버블티를 주문했다. 어느새 해가 뜨거워져 야외테이블에 앉을 수가 없다. 작은 얼음 알갱이가 가득 든 시원하고 쫀득한 버블티 한잔씩을 마시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여기서 버스를 타면 버스 종점인 집 앞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 우이천 길을 따라 걸어도 데크길이 집 근처까지 연결된다. 걸어서 집으로 가기로 했다. 


요즘 밤에 나와 이 길 따라 아이와 달리기 연습을 했었다. 

“엄마, 달려갈까?” 

“아니, 그냥 걷자” 

각자의 주머니에 불룩하게 과학실험에 필요한 풍선과 이제부터 깨끗해질 아들을 위한 바디워시가 들어있다. 천천히 걷는 게 나을 듯했다. 걷는 길 한 편에 북한산이 병풍처럼 펼쳐있다. 돌아가는 길에 우이천에서 오리도 만나고 목이 긴 하얀 새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앉는 모습도 만났다. 그늘 진 데크 길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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