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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Oct 17. 2023

다시, 아이와 산을 오르다.

- "어느 산으로 갈까?" 떠올릴 때부터 등산은 시작된다. 

* 초등학생과 등산 2 매거진은 <문앞비일상> 웹진에 "아이와 산에 오르는 방법 시리즈"로 연재했던 글을 모았습니다. 


“인수야, 엄마가 인수랑 산에 올랐던 글을 읽고 글 써달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어때? 우리 산에 다시 다닐까?” 아이가 잠깐 멈춰 생각하고 나는 기다린다. 

“그래. 엄마가 작가가 된다는데 내가 도와줘야지” 아이와 산행 시즌2의 개막을 알리는 대답이 들려온다.


아이가 내 코 밑까지 컸을 때다. 코 박고 핸드폰 게임하는 아이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하자 ‘에이씨’라고 했다. 그 순간, 눈앞에 아이가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고 그동안 키운 과정이 ‘에이씨’ 하는 소리와 교차되어 ‘내가 이 꼴 보려 그 정성 들여 키웠던가’라는 싶었다. 그 이후로 때때로 '에이씨'가 생각나면 감정들이 출렁였다. 도대체 이 시기는 어떻게들 지나간 걸까 궁금했다. 하지만 묻고 나서 대답이 도무지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남자아이 커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더 화가 났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아이와 나의 관계가 변하고 있었으나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에게 '고생'이 부족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이와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잘못된 진단에 잘못된 처방으로 나도 같이 고생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어린아이에게 산을 골라 다니며 아이의 성장을 확인했다. 아이와 오랜 시간 걷고 함께하며 내 뇌에 최신 정보를 새겨갔다. 아이가 큰걸 느끼자 아이와 적절한 거리도 점차 알아졌다. 


식탁을 붙인 벽에 3개의 지도를 나란히 붙였다. 맨 왼편에는 산맥, 강 표시가 잘 되어있는 사회과 부도에서 볼 법한 지도가 있다. 학습지 홍보물로 받았는데 색의 변화로 산맥의 높이와 바다 깊이를 알 수 있다. 가운데 붙은 지도는 전국에 가볼 만한 곳이 빼곡히 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지도 전문 회사 에이든에서 만든 최신판 관광지도다. 한눈에 보는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가려는 지역이 정해지면 지도에 추천한 장소들을 참고하기에 좋다. 오른쪽 지도는 블랙야크 우리나라 100 산이 표시되어 있다. 은박으로 가려져 있어 다녀온 곳은 긁어 색이 드러나게 만들어졌다. 아이와 다녀왔던 설악산, 마니산, 북한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지리산, 한라산은 초록, 연두, 노랑, 주황색이 보이고 나머지 산 들은 다녀올 날을 기다리며 은박 속에 숨어 있다. 이 지도들을 번갈아 보며 다음에 어느 산을 갈까 고민한다. 6학년이 된 아들은 지도를 보며 학교에서 가는 봄 여행 후보지 발표 준비로 바쁘다. 가장 득표수가 많은 곳으로 여행지가 정해진다고 한다. 엄마와 갈 산까지 골라야 해서 지도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우리 남쪽에 산은 안 가본 것 같은데. 계룡산에 가보고 싶어”

“거기 도사들이 수련하는 산으로 유명해. 인수가 좋아하는 책 <건방이의 건방진 수련기> 도사들도 거기서 수련했을 거야.”

지도를 보며 계룡산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머릿속 지도가 펼쳐지고 목적지까지 도로가 뻗어간다. 여행이 시작되었다.  


코로나로 멈췄던 학교 일상이 재개되고 아들 학교에서 계절마다 떠나던 여행도 다시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경합 끝에 봄 여행지는 제주도로 결정되었다. 산행은 여행 가기 한 주 전이다. 아이가 여행 전에 컨디션 조절을 하고 싶다고 했서 계룡산 보다 가까운 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가정방문온 둘째 어린이집 선생님과 대화가 벽의 지도를 타고 산 예기로 흘렀다. 얘기를 듣더니 한 시간 반쯤 거리에 있는 가리산이 아이와 오르기 좋다며 추천해 주었다. 어린이집도 그동안 멈췄던 활동들이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산행 후에 아들은 제주도를 가야 하지만 남은 가족들도 1박 2일로 어린이집 들살이를 가야 했다. 조금 더 근처의 산이 좋겠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변하는 상황 따라 아이와 산행 장소에 대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일상에서 틈틈이 여행이 이어졌다. 


“나 보러 소요산 역까지 올 수 있어?”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점심 먹자는 연락이 왔다. 마침 일을 조정할 수 있어서 친구의 직장 교대시간에 맞춰 다녀왔다. 친구는 내 산행 계획을 듣더니 손사래를 쳤다. 

“산에 가기 늦었어. 날파리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낮엔 또 얼마나 더운데. 산에 가기 좋은 때 다 지났다, 얘!” 

내 아들 또래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친구의 얘기에 산에 가기 좋은 시간대와 복장에 대한 힌트를 얻어왔다. 5월엔 산에 온갖 벌레가 다 깨어나 있다니 안 좋은 소식이다.  


우리 집은 북한산 아래에 있다. 북한산 아래에 살지만 북한산에는 잘 안 간다. 남편과 이사 와서 딱 한 번 백운대 정상까지 다녀왔다. 코로나 때 아이들과 집에만 있기 답답해 영봉에 데려갔다. 도선사 주차장에서 한 시간이면 가는 곳이다. 거길 오르는 사이에 오빠는 빨리 가고 싶어 몸이 들썩이고 동생은 앉아서 개미를 봐야 했다. 결국 큰 아이는 답답해 울고 동생은 오빠가 화낸다고 울음이 터졌다. 지나가던 등산객이 “도와드릴까요?” 하는데 손짓하며 그냥 가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가족 산행은 주말 일정에서 빠졌다. 


“북한산을 갈까?”

“거긴 갔었잖아.”

“그럼 도봉산 갈래?”

“맞다. 거긴 엄마 혼자만 갔었잖아. 나 도봉산 가고 싶어”


디데이를 며칠 남기고 도봉산으로 결정됐다. 우리 집은 북한산 아래지만 도봉산과 경계에 있다. 북한산이 뒷산이라면 도봉산은 앞산쯤 될 것이다. 일요일 오전에 출발해 더워지기 전에 하산하기로 했다. 이제 코스를 살펴 차례다. 도봉산 자운봉까지 가는 것은 이번엔 무리다. 다리 뭉친 것이 며칠 가면 오랜만에 떠나는 큰 아이 여행에 지장이 갈 수 있다. 어린이집 엄마들과 도봉산 원통사 가는 길을 통해 북한산 영봉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길이 완만했다. 원통사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가지 않고 도봉산으로 가는 길이 있으면 이번 코스로 적당할 것 같았다. 블로그를 찾으니 딱 맞는 코스로 다녀왔다는 글은 안 보인다. 우이탐방지원센터에서 우이암까지 다녀온 글과 도봉탐방지원센터에서 우이암까지 다녀갔다는 글을 종합했다. 우이암은 원통사 바로 위니까 대략 4시간 정도 잡으면 될 것 같다. 아이와 갈 때 한 시간 정도 더 걸리는 걸 감안하더라도 오전 8시에 출발하면 더운 시간 전에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앞 산이지만 국립공원인지라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통제구간은 없는지 확인했다. 탐방 코스 중에 ‘우이암 코스’가 도봉탐방지원센터부터 우이암까지로 편도 1시간 반, 난이도 ‘하’로 소개돼있다. 우이암을 넘어가서는 도봉탐방지원센터 가는 표지판을 찾으면 된다. 이 모르겠는 구간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산행하기 쉬운 구간이 될 것이다. 당일 아침 편의점에 들러 물 두 병과 아이가 원하는 간식만 사기로 했다. 가벼운 등산복 차림에 등산 스틱까지는 필요 없겠지만, 우이’ 암’에 오르려면 장갑은 필요할 것이다. 


큰 얼개는 아이와 함께 계속 의논해 왔는데 세부 코스를 짜면서 새로운 길을 찾고 싶다는데 쏠려 세부 코스를 나 혼자 정하고 있는 걸 몰랐다. 우리 아이가 누구인가. 자기표현 잘하라고 꾸준히 격려받고 자라지 않았는가. 후폭풍을 짐작도 못한 채 산행은 시작되었다. 일요일 늦잠꾸러기가 미리 얘기해놨다고 7시 반쯤 깨우니 잘 일어났다. 보조가방에 핸드폰과 카드 한 장 넣고 등산 앱을 계속 켜고 갈 거라 보조 배터리도  챙겼다. 집 앞 편의점에서 물 한 병씩 샀다. 아이는 옥수수수염차와 간식으로 초코바 하나를 골랐다. 간식이 작아 보여 소시지와 풍선껌을 추가했다. 자, 드디어 출발이다. 편의점을 나와 걷는데 버스 종점 앞에서 아들이 도봉산을 가기로 했으니 버스 타고 도봉산으로 가자고 한다. 길 하나 건너면 도봉산인데 북한산에서 시작해 도봉산오르 넘어가자고 했다. 말하면서 이걸 왜 지금 얘기하고 있지 싶어 아차 싶었다. 다행히 아이가 따라와주었다. 큰길로 나와 북한산 우이 경전철역을 지나갔다. 산 쪽에 우이 가족캠핑장으로 향했다. 캠핑장 옆에 원통사 팻말을 보고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조금 가니 음식점이 보이고 예전에 왔을 때 주변에 뛰놀던 닭들이 이른 아침이라 모두 닭집에 모여있다. 원통사 탑에 달린 예쁜 전등을 보여주고 싶어 가족과 함께 왔다가 둘째의 업어줘 가 시작되 돌아 나왔던 곳인데 아들이 기억하고 있다. 음식점 족구장을 지나자 날파리가 등산로를 한가운데 커튼처럼 막고 있다. 어쩌겠나. 빨리 지나갈 수밖에. “엄마 귀에 날파리 들어간 것 같아!” 아이가 질색한다. 내 얼굴에도 날파리가 부딪히는 느낌이 난다. 지금은 등산할 때가 아니라고 손사래 치던 친구가 떠오른다. “날파리가 밝은데 찾아 귀에서 곧 나올 거야.” 다행히 좀 더 걸으니 아이도 날파리도 금세 잦아든다. 완만하게 이어진 오르막 거치니 산속에 파 묻혀 있는 원통사가 보인다. 


“어, 벌써 다 왔네” 아이 마음속에 12시까지 집에 돌아가는 게 목표였다는 걸 이 때는 미처 몰랐다. 

“내가 난이도 ‘하’라고 했잖아.”

원통사의 나지막한 불경 소리를 들으며 경내로 들어서니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뿌연 하늘은 아쉽지만 멀리 잠실타워까지 보인다. 화장실을 다녀오며 커다란 가방을 메고 쉬는 분들께 우이암까지 가는 길을 물으니 표지판도 없는 길을 가리킨다. 머리 위까지 오는 큰 배낭을 멘 사람들이 궁금했는데 일부는 암벽등반하는 분들이고 일부는 능선 따라 멀리까지 종주하는 사람들이었다. 내 집 앞 산이 큰 산인 것을 새삼 느낀다. 산행을 떠올리면 지리산, 설악산을 먼저 생각했는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소요산까지 연결해 종주하기도 한다고 했다. 아들과 경내에 들어서니 그늘 벤치를 양보해 주시던 할머니는 젊어서는 능선 타고 많이 다녔는데 내일 모래가 팔십이라 이만큼씩만 오른다고 하셨다. 송추 쪽으로 내려가는 길도 좋다고 알려주는 눈빛이 반짝였다. 곧 팔십 세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우이암 가는 길로 들어서니 네 발로 바위를 오르게 된다. 갑자기 난이도가 상승했다. 여태까지 싱글벙글하던 아이의 말 수가 줄어들었다. 도봉산으로 넘어가는 길을 찾으며 가고 있는데 아이는 왔던 길로 돌아가면 안 되냐고 한다. 

“응, 상관없어. 오늘은 힘들지 않을 만큼만 가자. 그런데 도봉산 가기로 했으니까 도봉산으로 하산해 보는 게 어때?” 

아이 컨디션이 우선이었다가 새로운 길로 가는 게 우선이었다가 내 안에서 우선순위가 왔다 갔다 한다. 우이암에 오르고 도봉산 정상들이 한눈에 보이니 더 넘어가 보고 싶어 진다. 우이암까지 2.4km 거리를 한 시간 반쯤 걸려 도착했다. 우이암 도착을 잘 느낄 새도 없이 아이는 도봉산으로 내려가려는 내 기세를 느끼고 입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엄마 맘대로 할 거잖아” 

어차피 내 맘대로 할 거지만 저 말은 듣고 싶기 싫다. 최대한 내가 가고 싶은 마음을 잘 전달하려 애썼다. 아리 돌려 얘기해야 내 말대로 해줘겠지만. 어제저녁쯤 이야기 나눴으면 훨씬 여유 있는 대화가 가능했을 텐데 산 정상에서 이 얘기를 하고 있을까 싶다. 나는 올라온 길 보다 더 쉬울 거라는 사람들 얘기에 더 도봉산 쪽으로 내려가고 싶고 아이는 거리가 더 길어질 것 같아 더 원점회귀가 더 하고 싶다. 나는 지도에 없는 새로운 코스를 가보는 게 중요하고 아이는 12시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하다. 코스를 얘기하고 있지만 코스가 중요한 게 아니다. 도봉 탐방센터까지 3.5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발견하자 아이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럼 저기로 가면 한라산에 올라간 거리만큼이 되는 거잖아!”

“에이~ 거긴 편도가 그만큼인 거지. 내려오는 것까지 하면 한라산이 훨씬 길지~”

“꼭대기에서는 헬기 타고 내려왔다 치고. 소백산은 정상이 데크여서 편했는데. 치, 그럼 이리로 내려가면 소백산만큼은 올라간 거네!” 

이 와중에 불평에 나오는 비유가 참 듣기 좋다. 경험한 것들이 이렇게 녹아 나오는구나 싶어 아이짜증 듣으며 감탄했다. 난이도 ‘하’ 였어도 오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 다녔던 산들보다 쉬워져 아이가 힘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구상하고 가는 사람은 힘들어도 실현되는 걸 보는 재미가 있는데 큰 그림을 모르고 끌려가는 사람은 힘들기 마련이다. 배려가 부족했다. 


도봉탐방센터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어렵게 결정되었다. 방향을 정하기까지 힘들었지 어느 쪽이든 내리막길은 금세 갈 수 있다. 사람들이 이정표로 얘기해 준 “천진사”가 곧 나타났다. 아이는 “바보사”라고 바꿔 불렀다. 엄마가 가자는 대로 내려가주기는 하지만 심기가 불편하다. 고맙다, 아들아.  


<현위치>에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도봉탐방지원센터로 내려왔다. 


도봉산 입구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넘쳐났다. 코로나 이후에 처음 산행을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도봉산 탐방로 입구가 둘레길들과 연결되어 있어 어린아이와 온 사람들도 많고 어르신들도 많았다. 동네 산 분위기가 물씬 났다. 하산해서 뜨뜻한 밥을 먹는 것 까지가 내 산행의 계획이었는데 아이는 팥빙수나 먹고 집에 빨리 가고 싶다고 했다. 


“팥빙수를 먼저 먹으면, 밥이 맛이 없잖아”

“밥을 먼저 먹으면, 팥빙수가 맛이 없잖아!”

 

실랑이 끝에 이번에 내가 볼멘소리로 져준다.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카페에서 팥빙수를 먹고 배부를 만한 빵들도 같이 주문해 먹고 한숨 돌리고 집에 왔다. 이번에 보니 아이는 키가 눈에 띄게 커져있다. 보는 눈이 없는 엄마가 마음도 크고 있겠거니 짐작해 본다. 아이가 커가는 동안 나는 산에 갈 때마다 어떤 변화를 겪고 있을까. 오늘을 찬찬히 돌아보니 나는 내가 그리던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지리를 점점 잘 알고, 아이 속도에 맞춰 산을 다닐 수 있는 어른이 조금 더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먹고 싶은 걸 양보할 수 있는 멋진 어른도 되었다. 


아들이 마음에 품었던 집 도착시간. 엄마가 원하는 코스로 가느라 산에서 내려오니 12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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